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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화와 수선화 : 허련의 붓끝에서 탄생한 추사 김정희 이미지
작성일
2023-08-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56

매화와 수선화 : 허련의 붓끝에서 탄생한 추사 김정희 이미지 옛 선비들은 꽃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퇴계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꽃을 벗하고, 꽃으로 방 안을 장식하고, 꽃에 관한 글을 짓는 등 애정을 유별나게 표현했다. 19세기 조선의 학예를 이끈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그가 각별히 사랑한 꽃은 매화와 수선화였다. 스승의 모습을 붓끝에 담아낸 허련(許鍊, 1809~1892)의 작품이 알려주는 추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01.허련, <인물상>, 《완당난화》, 1853년 이후, 종이에 엷은 색, 26.5×12.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치 허련, 스승을 그리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완당난화(阮堂蘭話)>라는 작은 첩(帖)이 전한다. 첩의 앞에는 허련이 그린 인물화가 있고, 이어 김정희의 난 그리는 법에 관한 글이 필사(筆寫)되어 있으며, 그 뒤로 원나라 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을 언급한 허련의 글과 산수화가 있다. 첫 면의 인물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심의(深衣)를 입고 동파관을 쓴 노학자가 책상에 앉아 진중하게 글을 쓴다. 주름진 얼굴에 흰 눈썹, 흰 머리, 흰 수염이 역력하다. 옆에는 서책이 든 채색 포갑(包匣), 붓과 종이가 꽂힌 필통, 벼루와 채색 잔이 놓여 있다. 화문석이 깔린 방 앞에는 화로와 차 주전자, 채색 잔들이 보인다. 둥근 창호 옆 오래된 나무 탁자에는 매화 분재와 수선화가 눈길을 끈다. 백자 화분에 심어진 백매(白梅)는 굴곡진 가지가 마치 춤추듯 인물의 머리 위로 뻗어 있으며, 수선화는 구근식물임을 알리듯 둥근 뿌리가 드러난 모습이다. 고급 물건이 즐비한 방 안에는 인물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난다. 더욱이 조선 선비의 방에 청나라 스타일의 둥근 창호라니! 누구인가? 그는 바로 허련의 스승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 김정희, 매화와 수선화를 사랑한 이

허련은 왜 스승의 방 안에 매화와 수선화를 그렸을까? 김정희는 여러 꽃들을 시로 읊었지만 그가 특별히 사랑한 것은 매화와 수선화였다. 중국인 친구 오숭량(吳崇梁, 1766~1834)이 사랑한 매화를 흠모하여, 매화 감실을 만들어 오숭량의 시를 공양하고 감실 밖에 모두 매화를 심었다. 또 「감매탄(龕梅歎)」에서는 “듣지 못하였나, 천 그루 만 그루의 매화는 광복산(光福山), 나부산(羅浮山)과 비등하다고(未聞千樹萬樹梅 曾與光福羅浮比)…어찌하면 삼백 궁(弓)의 작은 동산 얻어 가로 세로 매화만을 옮겨 심을까(安得小園三百弓 徧種梅花而已矣)”라며, 동산 가득 매화가 만발하게 핀 환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길 소망했다.


수선화는 김정희와 청조 문사의 교유를 보여주는 또 다른 꽃이다.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문인 조강(曹江, 1781~1837)과 교유하며, 그의 스승 당성(唐晟)이 그린 수선화 그림을 감상했다. 또한 완원(阮元, 1764~1849)의 칭송을 받은 호경(胡敬, 1769~1845)의 「수선화부」를 적어도 두 차례 이상 긴 서권(書卷)으로 제작했다. 무엇보다 수선화는 제주도 유배(1840~1848)라는 인생의 시련기에 추사의 고달픈 마음을 달래준 꽃이었다.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수입된 수선화의 인기는 지나칠 정도에 이르러 1834년 수입금지 품목에 오를 정도였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토종 수선화를 발견하고 한양의 벗들에게 알리는 한편 유배 생활의 심정을 수선화에 기탁했다. 이 가운데 한 편을 보면,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아래 만난 수선화와의 인연을 선연(仙緣)이라 일컬으며, 제주도 곳곳에 널린 대수롭지 않은 토종 수선화를 창 밝고 안석 깨끗한 곳에 올려 공양한다고 읊었다.


수선화가 곳곳에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밭고랑 사이에 더욱
무성한데 이곳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보리갈이 할 적에
모두 뽑아 없앤다(「水僊花在在處處可以谷量 田畝之間尤盛
土人不知爲何物 麥耕之時盡爲鋤去」).

碧海靑天一解顔 푸른 바다 파란 하늘에 얼굴이 확 풀리니
仙緣到底未終慳 선연(仙緣)이란 끝내 인색한 게 아니로세.
鋤頭棄擲尋常物 호미 끝에 버려진 심상한 이 물건을
供養窓明几淨間 창 밝고 탁상 조촐한 그 사이에 공양하네.


02.허련, 「수선화도」, 『완당탁묵첩 수선화부』 2면, 1877년 이후, 23.5×60.8cm, 추사박물관 03.김용준, 《기명절지도》 10폭 병풍 중 9폭, 1942년, 비단에 색, 130.3×35.7cm, 개인 소장

수선화, 추사를 기억하는 꽃

허련이 제작한 『완당탁묵첩 수선화부』에는 현전하지 않는 김정희의 수선화 그림이 판각되어 있다. 상단에는 “조이재(趙彛齋) 옹(翁)이 쌍구(雙鉤)로써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그 법도는 한가지다(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秃潁亂抹橫塗 其揆一也)”라는 화제가 쓰여 있다. 마늘처럼 둥근 수선화 뿌리에서 뻗어 나온 파 같은 줄기와 간략한 형태의 꽃송이는 최소한의 형상에 자신의 심회(心懷)를 기탁하고 필묵미를 추구한 추사의 회화적 지향이 잘 드러난다.


이 수선화 이미지는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에 의해 1939년 2월에 발간된 문예지 『문장(文章)』의 창간호 표지화로 선택되었다. 추사체로 집자(集字)한 표제 아래 탁묵첩 오른쪽의 키 작은 수선화를 배치하고 담채를 더해 근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했다. 허련이 스승의 글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탁묵첩 속 수선화는 김정희를 예술적 지표로 삼은 김용준에 의해 근대 지식인들의 마음속에 추사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2년에 그린 《기명절지도》 병풍에서는 구근이 보이는 수선화 화분과 함께, 제주도에서 발견한 토종 수선화를 공양한다는 김정희의 시를 화제(畵題)로 씀으로써 추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켰다.


참고문헌:『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 국립광주박물관, 2008.
『추사가 사랑한 꽃』 추사박물관 학술총서 13, 추사박물관, 2019.
유순영, 「표상과 기억: 추사 김정희와 수선화 이미지」, 『문헌과 해석』 통권90호, 2022.




글, 사진. 유순영(인천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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