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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통조경, 청복의 토대
작성일
2024-06-2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

전통조경, 청복의 토대 “글은 이름자만 쓸 정도면 족하고, 재산은 입고 먹을 수만 있으면 족하니, 달리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임원(林園: 향촌)에서 고상하게 수양하면서 세상에서 따로 구하는 것 없이 한 몸을 마치고 싶습니다.” 하늘 신인 상제(上帝)에게 각각 고위 관리, 부자, 문장가가 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상제는 이들의 소원을 모두 허락했다. 서두에 적은 말은 마지막 사람의 소원이었다. 상제는 이마를 찡그리며 이 소원을 거절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청복(淸福: 청아하고 한가롭게 사는 복)을 누리기는 불가능하니, 너는 함부로 구하지 말라.” 01.강진 백운동 원림

청복의 조건은 열망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일상을 누릴 삶터에서 복락을 고민하다

네 사람이 받은 복의 내용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16분야 중 하나인 「이운지(怡雲志)」 서문에 나온 내용이다. 『임원경제지』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저작이다. 청복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조선인들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청복은 지금의 표현으로 옮길 단어가 마땅치 않지만, 복락이나 행복 정도가 그나마 근접한 의미다.


「이운지」는 향촌에 살면서 청복 추구를 위해 필요한 물질적·문화적·심리적 토대를 어떻게 구축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정리한 문화예술 백과사전이다. 조선의 서적 중 이 분야에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체계적이고, 가장 깊이가 있다. 여기에서 주 가옥 및 부대 건축물의 배치와 조경법을 세밀히 소개했다. 전통조경의 학술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토대를 갖추었다.


02, 03.「이운지」 원본(사진 왼쪽)과 번역출간본 Ⓒ임원경제연구소

청복의 조건은 열복의 열망을 내려놓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음을 비웠다면 일상을 누릴 삶터가 필수적이다. 어떤 곳에서 살아야 복락을 누릴까. 이것이 『임원경제지』의 주거선택 백과사전인 「상택지(相宅志)」 전체의 주제다. 이 책에서는 살 곳을 고를 때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크게 네 가지를 꼽았다. 그것은 지리(地理)·생리(生理)·인심(人心)·산수(山水)다. 지리는 천연 그대로의 지형 조건이고, 생리는 생업 조건이다. 인심은 마을 구성원의 마음을 말하고, 산수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전통조경은 그 중 첫째 조건인 지리에다 넷째 조건인 산수의 일부를 들여다 놓으려는 노력이 내포되어 있다.


04, 05.용도서와 구문원(「이운지」), Ⓒ임원경제연구소

선인은 영통해지는 기틀을 만들기 위해 정취와 풍경으로 공간을 차별화했다

전통조경은 경치를 아름답게 꾸미되 전통의 방식으로 하는 행위다. 올해 발효된 「자연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의 정의에 따르면 전통조경은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문화·사고 등을 담아 수목을 식재하거나 건축물을 배치하는 등 전통적인 기법으로 외부공간을 조성하는” 활동이다. 조경학이 건축물 ‘외부’를 주된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기 때문에 이 같은 규정이 파생되었다. 이는 서양에서 시작된 조경학을 한국화한 정의다.


조경이라는 말은 사실 우리 역사에서 사용했던 용어는 아니다. 그 대신 ‘위치(位置)’나 ‘포치(舗置)’라는 표현으로 썼다. 전통조경이라 할 때 우리는 보통 궁궐·사찰·서원·누각이나 개인 한옥 같은 전통식 건축물의 주변 환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포치나 위치로 표현한 조경의 범위는 외부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실내건축학에서 다루는 ‘실내공간’의 배치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조경의 주체가 거주지의 구성원인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집을 꾸미는 데 실내를 배제하고 굳이 집 밖만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업 공간과 마음 수양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전통조경에서는 환경, 즉 자연과 문명 공간을 단절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최적의 장소에다 시설물을 추가하면서 그와 어울릴 만한 자연물을 조성한다. 나무나 화초류, 그리고 가축류와 누에를 포함하여 학·사슴 등 조수와 금붕어·거북이 등 수생생물이 그것이다. 이들 생물에 더해 돌 또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다. 물도 필수다. 물이 없는 곳이라면 대나무 등을 활용해서 물을 끌어와야 한다. 이런 자연물의 공간 사이사이의 적절한 곳에 가구나 기구 등을 배치한다.


이 같은 배치를 통해 선인들은 인위를 주로 반영한 세속 공간과는 차별화하도록 그윽한 정취[幽趣]와 청아한 풍경[雅觀]을 자아내려 했다. 또 생각을 맑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함으로써 정서적으로 순화되면서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설계했다. 주거 공간의 아름다운 배치는 마음이 원만해지고 영통(靈通)해지는 기틀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선인들이 집 주위에 꾸몄던 방식은 논밭, 과수원과 텃밭, 연못, 울타리 등의 배치 및 기능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나무와 화초의 유용성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식재하고 가꿔야 한다. 전통조경은 곡식, 채소, 약재, 가축, 애완동물, 물고기, 과일, 나무 등이 어우러진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주 가옥을 중심으로 무한한 창조적 변주가 가능하다.


06.세 겹의 울타리로 조성한 전통조경의 사례(「이운지」), Ⓒ임원경제연구소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적 관계임을 인지한 전통조경

「이운지」에서 소개했듯이 울타리를 세 겹으로 쳐서 그 안에 거주 가옥과 과수원, 텃밭으로 채우고, 연못 2개를 조성한 조경도 가능하다. 재력과 의지 여하에 따라 음악실, 도서실, 약방, 서당 등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도 추가할 수 있다. 또 이전에 없던 새로운 구상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태극(太極)과 팔괘(八卦)의 효시가 되는 그림인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원리를 반영한 정원을 꾸밀 수 있다. 이 정원은 이른바 용도서(龍圖墅)와 구문원(龜文園)이다. 아직 재현된 적은 없지만 대한민국은 용도서나 구문원 정도는 재현할 아취와 안목을 지닌 나라다. 


전통 시대에는 조경을 통해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을 추구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적 관계,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철저히 인지했다. 그 결과 자생식물을 배치할 때도 조선 산하의 모든 생물 중 극도로 선택된 일부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사상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마련이다.


공자는 말했다. “사람은 본바탕[質]이 꾸밈[文]보다 지나치면 투박해지고, 꾸밈이 본바탕보다 지나치면 번드레해진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라고, 그렇기에 “문(文)과 질(質)이 빈빈(彬彬: 적절히 균형을 맞춤)한 뒤라야 군자답다[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문과 질이라는 인격의 두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이 군자라는 것이다. 이 명언을 전통 조경관에 적용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이 지나치게 들어오면 투박해지고, 인위적 개입이 지나치면 번드레해진다.” 그러나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조화가 어렵다면 나는 자연의 요소가 더 많은 조경이 낫다고 생각한다.


조경 없는 거주지는 삭막하고 무미건조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한 이들에게는 조경이 한가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라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무리 삶에 찌들어 살아도, 고시원의 좁은 공간에서도 들판의 화초 한 그루 정도는 기를 수 있다. 전통조경 자체가 청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임원에서 고상하게 수양하면서 청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통조경이 원천적 토대가 되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매일 생활하는 공간으로 조경을 끌어들여 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안빈낙도니, 물아일체니 하는 선인들의 거창한 삶의 철학 일부를 실천하는 셈이다. 청복은 각자가 스스로 구성해 낸 조경을 허심하게, 힘을 빼고 즐길 때 한 발짝 더 자신에게 들어오지 않겠는가.




글·사진. 정명현(임원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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