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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답사기] 수타사 가는 길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0-24
조회수
4758
작성자 : 박준영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우수상(5위) 수상작]



괴나리봇짐을 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 대부분을 방문했었다고 자부하던 내게 수타사는 그저 피서를 즐기는 유원지로 밖에 각인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혹은 또래들과 시원스런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라면을 끓여먹던 기억만이 남아 있는 수타사. 더 이상 古刹 수타사를 흥청망청의 공간으로 놔둘 순 없었다. 카메라와 생수 한 병을 챙기고 수타사행 버스에 올랐다.



사뿐사뿐 내딛는 고난의 발걸음

버스가 출발 한지 30분 만에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관광철이 아니고 게다가 평일이었던지라 주차장은 무척 한산했다. 가족 나들이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일행은 입구의 음식점에서 도토리묵과 감자부침개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또한 어느 연인은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외로운 내 곁을 자랑하듯 지나쳐갔다. 배고픔과 적적함을 뒤로하고 ‘나도 나중엔 꼭 여자친구를 대동해서 맛난 것을 먹어야지’라는 다짐을 하면서 수타사 입구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웅장한 대웅전도 아니요. 승복을 휘날리는 노스님도 아니었다. 한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날파리떼, 가던 길을 곧장 가면 되었을 걸 부도와 부도비를 본다고 산길로 들어선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이미 들어선 길을 나온다 한들 날파리떼가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일체유심조. 나에겐 오직 부도와 부도비만 있다고 생각했다. 청송당대사탑, 기허당대연대사탑, 서곡대사부도, 유화당대사묘위지탑, 중봉당탑, 홍파대사승왕탑, 홍우당부도 등 7기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 이곳은 달랑 허리 높이의 울타리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에 의한 파손이 우려되셨는지 아마도 부처님께서 사천왕 대신 날파리를 보내셨나보다. 이유로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 해도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미천한 중생에게는 날파리떼의 습격이 너무나 가혹할 뿐이었다. 결국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한 채 그곳을 서둘러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천왕에 기죽고 약수에 기살다

어느 사찰이나 그렇듯이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사천왕과 조우해야만 한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사천왕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움츠려들게 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왜 이럴까. 빨리 죄를 빌고 가뿐한 마음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도저히 잘못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엉겁결에 생각해 낸 게 집에서 출발하기 전 옆집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른을 보면 인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건만 내성적인 성격상 그게 잘 안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인사 잘하겠다고 다짐한 후 용서를 빌었다. 죄의 사함을 받았다 믿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었다. 여기서 잠깐 수타사에 대해 알아보자. 통일신라시대인 708년(성덕왕 7년) 창건된 수타사는 본래 우적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457년(세조 3년) 현재의 위치인 공작산에 자리를 잡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후에 증·개축되는 역사의 변고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다. 이러한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대적광전, 봉황문, 칠성각, 동종 등이 문화의 정취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대형 사찰이 아니라서 유물들을 돌아보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뜨거운 날씨 탓에 얼굴에서는 연신 땀이 흐르고 가져간 생수병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 귀를 청명하게 해주는 해맑은 물줄기 소리. 약수였다. 시원하게 흐르는 약수를 생수병에 반쯤 담아 마셨다. 온갖 달콤함과 청량함을 전해주려는 듯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약수의 힘으로 사천왕에게 겁먹었던 기억을 말끔히 소화시킬 수 있었다.



어느 촌로와의 만남

몇 해 전, 신문을 통해 수타사에 보물 제 745호인 ‘월인석보’가 소장되어 있다는 기사를 접했었다. 하지만 경내 어디에도 월인석보가 모셔진 곳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조그마한 건물 앞 의자에 앉아 관람객들을 주시하고 계신 어느 촌로를 보게 되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월인석보는 어디 있죠?” 그러자 벌떡 일어서시며 손가락으로, “저기 좀 봐봐.”라고 하셨는데 그 분이 가리킨 곳을 보니 ‘문화재 안내사, 안내시간 : 화수목금토’라는 글귀가 보였다. 그랬다. 그 분이 바로 이름도 생소한 ‘문화재 안내사’였던 것이다. 제대로 짚었다는 생각에 “저, 죄송하지만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뭐! 이 자식아!”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돌아온 것은 친절한 안내가 아닌 커다란 불호령이었다. “어른을 봤으면 먼저 인사를 하는 순서 아냐!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쯧쯧쯧.”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유야 어쨌든 먼저 인사를 드리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는 것이었다. 이는 방금 전 경내에 들어설 때 분명히 사천왕께도 잘못을 빌었던 내용이 아니던가. 짧은 시간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니 할아버지의 노기가 조금은 풀리신 듯 했다. “따라와.” 손으로 유리문을 미시는 할아버지. 알고 보니 반자동문이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월인석보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유리 속에서 숨쉬고 있는 월인석보와 불화 몇 점, 고즈넉한 불상도 보였다.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저기, 월인석보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원래 문화재는 사진촬영이 안됨을 알고 있었지만 후레시를 터뜨리지 않으면 일부 허용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은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만의 예상은 철저히 빗나가 버렸다. “세상에 어떤 무식한 놈이 문화재를 사진 찍냐. 그럴꺼면 뭐 하러 유리에다가 모셔놨겠어!”



주목그늘 아래서

그렇게 할아버지와 한바탕 소란을 치른 후 우여곡절 끝에 건물을 나올 수 있었다. 솔직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지만 어른의 말씀이 틀린 것은 없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아직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노여움 푸세요.” 힘들게 사과의 말씀을 전하니, “괜찮아. 다 배우면서 크는 거지 뭐. 가기 전에 주목 보고 가라. 사진도 좀 찍고” 강원도보호수 제166호로 지정된 수령 5백년의 주목 한 그루. 1568년 사찰 이전을 관장하던 노승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자라난 것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수령 500년에 가까운 주목은 주위의 나무들을 압도하듯 새파란 이파리를 사방팔방으로 뻗치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잠시 그곳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소리 새소리가 귀를 자극했고 자연의 푸르른 향기가 후각을 매만졌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지로 합천 해인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을 관람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 경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갑자기 주지스님 한 분이 오시더니 모두 모이라는 것이 아닌가. “학생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 어려서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해인사는 종교적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긴 하지만 더 넓게 보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을 제가 책임지고 있구요. 그런데 일부 학생이 저를 보고 부정스런 말을 하더군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주지스님께 실례를 범했던 것이었다. 지금의 내 경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말을 해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분명 있을 터. 왜 인사를 하는데 주저했을까. 왜 재빨리 사과를 하지 않았을까. 아직도 촌로와의 만남을 마음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나보다.



바람결에 근심 하나 내려놓고

힘들게 몸을 일으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시원한 계곡의 물줄기도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스님이 보였다. 반응적으로 두 손을 모으고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스님은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놓고 합장하며 내 인사를 받으셨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스님과 난 동시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처님은 떠나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셨다.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남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로 내가 먼저 행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화답한다는 것을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도 날파리떼가 날 반겼다. “날파리들아. 잘 있거라. 다음에 또 보자꾸나.” 시작부터 끝까지 날 괴롭혔던 그들을 뒤로하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바람결에 근심 하나를 내려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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