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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혁신

제목
[문화재답사기] 잃어버린 왕국 가야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0-17
조회수
4190
작성자 : 최미정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우수상(4위) 수상작]



경남 산청군 금서면 소재 구형왕릉을 다녀와서



어버이날, 아버님 산소도 뵐 겸 시댁을 찾았다. 지리산 밑 아담하게 자리한 작은 동네는 늘 그렇듯 조용하다. 어린 시절 다리 하나를 건너면 산청군이라고 말하던 고모의 설명이 낯설어 저 다리 건너엔 이방인이 사나 두려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차속의 아이들에게 똑같이 설명을 하니 그때의 나처럼 낯설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좀 더 커 서 사회나 지리 과목을 배우게 되면 엄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남편과 나는 둘 다 함양군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함양이나, 산청 지리산 골짜기의 풍경쯤은 늘 눈 안에 두고 산다. 신혼 초 산 너머 내 살던 집을 두고 어려운 시어른들과 1년을 함께 살 무렵, 그런 내 모습이 안 되었던지 남편이 나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가로수가 놓인 시골길을 달려서 산청군과, 함양군을 경계 짓는 다리를 건너 금서면 우체국, 농협을 지나고 있었다. 산으로 이어진 길 입구로 접어들 무렵 큰 향교로 보이는 유명한 절에서나 봄직한 오색 단아한 색체를 꾸민 집들이 몇 채 모여 있었다. 넓은 정원에 정갈하게 심어진 나무들이 그곳이 예사로운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곳이 바로 덕양전 이라는 제실인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그 크기나 규모가 절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웅장했다.

훗날 지나치다보니 한번 행사가 벌어질 때면 대 여섯은 넘는 관광차가 마당을 빼곡히 채우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덕양전 옆으로 꼬불꼬불 놓인 논길을 오르다 보면 산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계곡을 만났다. 물이 참 깨끗하다 하였더니 마을의 식수원이라며 오염을 막아달라는 간절한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오른 정상에서 차를 대고 잠시 걸었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고 오를 테면 한번 와봐라 으름장을 놓는 듯한 산 하나가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름도 왕산으로 지리산의 줄기답게 위엄이 있었다. 남편은 초등학교 때 그 산을 수없이 올랐다 한다. 담임선생님이 행글라이더셨는데 정상 꼭대기까지 오르기엔 그 짐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힘센 사내아이 넷을 이끌고 산을 오르셨다는 것이다. 무거운 짐은 둘씩 번갈아 들게 하고 정상에 오르면 선생님은 행글라이더에 실려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아이들의 손엔 4인분의 짜장면 값이 들려 있어 산을 오르던 수고가 싫지 않았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왕산 아래로 시원한 계곡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하나 넘으면 첫인상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무덤하나를 발견한다. 가야의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 전해져 내려오던 구형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예부터 가락국, 가야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려져 이름마저도 작은 풀나방 같이 작게 들리는걸 보면 작은 슬픔 같은 게 묻어 나온다. 그 무덤을 처음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듯 외진 곳 에서 쓸쓸하게 앉아있구나. 고운 잔디를 덥고 햇빛마저도 무릎 꿇는 다른 유수의 왕릉들의 무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산에 가려서 조금 먼 곳에서 보면 이 무덤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났을 나그네들도 많을 것이다. 이곳을 알리는 표지마저 없었다면 말이다. 돌을 쌓아 만든 7단의 피라미드형 무덤가운데에는 사각형 모양의 작은 창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내가 그 구멍에 대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물으니 그래도 이 고장 토박이라며 몇 마디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 허황되긴 해도 신비롭다.

남편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돌을 주 워다 그 구멍을 맞추는 놀이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까지 가서 아무리 그 중간을 맞추려해도 잘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또 왕릉 주변에는 등나무 와 칡넝쿨이 뻗지 못하고 까마귀나 새 따위도 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까이 물이 흐르고 항상 그늘이 져 있음에도 이끼나 음지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라한 모습일망정 그런 이야기들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 주기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남편과 나는 가야의 땅에서 살고 있는 가야 유민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타까웠던 가야의 역사가 낯설지 않고 또 내 조상을 만난 듯한 구형왕릉의 모습에 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다른 무덤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 이끌림이 왜 이곳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돌아오는 내내 내 옷자락을 잡고 속내를 풀어내려는 무덤의 모습 같아서 같다가 돌아오는 일이 친정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올때의 죄스러움과도 비슷하게 닮았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 후 그곳엔 한여름엔 수박을 들고, 때로는 아이들이 먹을 과자 한봉지를 들고 가는 정겨운 장소가 되었다. 또 많이 알려진곳이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고 숙연한 마음으로 나의 옛 조상을 만나고 오기에는 그만인 곳이었다. 시댁과 10분남짓 거리인데 비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온 듯 가슴 벅차게 다가온 유적지는 이곳이 처음 인 듯하다.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가 왜 국보급 문화재에 들지 못 하는 것인지 널리널리 이 거룩한 모습을 전하고 싶은 사명감도 들었다.

구형왕릉은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석탑의 근거는 이와 비슷한 석탑이 안동과 의성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고,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 여지승람’이나 ‘산음현 산천조’에 기록된 문헌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헌이 이곳이 석탑이 아니라 왕릉임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왕릉으로서 대접 받지 못하고 구형왕릉 앞에 ‘전’ 자를 붙여 ‘전구형왕릉’이라 불리어 진다고 했다. 그것은 아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옛것이니 많은 설들에 사로잡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형왕릉의 비애가 어디 이곳 한 곳 뿐이겠는가. 강하지 못하여 그 흔적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지금도 수없이 자행되고 있다.

구형왕릉으로 오르는 초입에 구형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앞서 보았던 덕양전은 조선 정조 17년 왕산사로 부터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등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것이며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또 왕릉 옆에는 사당과 구형왕의 증손자로 알려진 김유신의 활터가 있는 것으로 구형왕릉의 입지가 조금은 굳어진듯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은 안심이 되는듯 하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 큰 명성을 떨칠만한 뒷받침이 없기에 이곳은 한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몇안되는 내 마음의 유적이 될것임에 틀림없다.

아버님 산소를 뵙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찾은 구형왕릉은 늘 한결같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볼 때 마다 달라지는 것이 그토록 슬픔으로 가슴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그 모습이 조금씩 빛이 나고 하얀 미소를 머금은듯 환해졌다는 것이다. 따뜻해진 날씨 탓인가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작년 여름 작열하던 더위 속에서도 볼수없었던 따스함은 그때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좋은 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났을 때 반가움에 뿜어내는 따뜻함은 어떤 열이나 빛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 유적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하고 또 그 왕릉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알게 모르게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돌이던 작은 식물이던 애정을 쏟으면 그것도 그 사랑을 느껴서 식물은 더 잘 자라고, 돌은 윤기 있게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내 조상의 무덤이야 얼마나 후손의 관심에 목말라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내가 지금 가지는 관심만큼 내 아이들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제 뿌리에 대해서 호기심 있는 눈을 가져 주기를 바란다. 좀 더 역사를 배운 후에는 그 역사 속 인물들의 고마움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어린 막내가 잘되지 않는 발음으로 지나가는 어떤 관광객에게 인사를 하니 귀엽다고 천원을 작은 손에 꼭 쥐어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이번 방문길에는 작은 추억 하나도 새롭게 만들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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