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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조화의 음악, 고집의 예술
작성일
2012-03-15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31

 

조선의 전문가들은 자신만의 전문 영역에서 작품으로, 글로, 혹은 기호로, 소리로 평생 자신의 자취를 남기며 살았다. 그들이 남긴 자취는 조선의 이곳저곳에 남아 조선을 살만한 곳으로 윤기 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주역으로 살지는 못했던 듯 보이지만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주역이었다. 양지에서 혹은 음지에서 그들이 묵묵히 해 낸 일은 대개 역사 속에 파묻혀 숨어 있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흔적은 도처에서 그들을 비추고 있다. 빛이 없어도 밝은 그들, 그들은 조선의 전문가다.

 

빛이 없어도 밝은 그들
지금 이 시대, 우리 눈에 흔히 들어오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자. 서울시내 한복판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경복궁, 종묘, 창경궁, 지방 어느 곳에 한가롭게 서 있는 고즈넉한 서원과 누정, 이 모든 곳은 건축 장인들의 손마디 굵은 아름다운 손길이 수만 번 수십만 번 어루만져 빚어진 공간이다. 박물관 한켠을 지키고 있는 고풍스런 그림들은 화원들의 땀방울 어린 붓끝이 수십만 번 스쳐간 결과이다.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판을 쥐락펴락하며 구성진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기수傳奇_,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선물했던 이들이다. 이처럼 조선의 전문가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교수와 훈장, 천문역산가, 광대, 승려, 의원, 음악가, 궁녀, 장인, 화원, 역관, 서쾌(조선시대의 서적 중개상)와 전기수, 금융업자 등, 이들의 일은 다양한 직업으로 드러난다.

 

 

사람들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음악가
여러 전문가 중 음악가 이야기를 들어 보자. 17세기 서울에서 유명했던 송경운宋慶雲이란 비파 연주가가 있었다. 그의 비파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실력이 어찌나 좋던지, 솜씨 좋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면 송경운의 비파와 비교해서 “어쩌면 그렇게 송경운의 비파솜씨 같아요?”라고 칭송했다. 송경운이 비파 연주 영역에서 이룬 최고의 경지, 그 이상을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영역에는 없었다. 그는 과연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물론 그 경지는 끊임없이 연습한 결과였다. 한 분야의 최고 수준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은 빠질 수 없는 법. 연습이 대가大家를 만드는 평범한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다.

송경운이 서울에서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며 생활하던 중 정묘호란(1627)이 일어났다. 그는 난을 피해 전주로 내려가 그곳에 우거하게 되었다. 비파 소리를 자주 듣지 못하던 전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훌륭한 음악가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곤 앞다투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전주 사람들의 귀는 예나 지금이나 수준이 만만치 않았을 터. 실력자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의 집은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송경운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반드시 방문객을 위해 자신의 비파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 누가 어느 때에 찾아와도 마찬가지였다. 비천한 자기를 찾는 것은 자신의 비파 솜씨 때문이니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지닌 데다 겸손함까지 갖추었다. 실력 좋은 음악가가 부리는 허세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송경운에게도 고민이 찾아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자신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과의 괴리 때문이었다. 정작 자신은 고조古調의 음악, 즉 정통성 있으면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진지한 음악을 좋아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 다시 말하면 최신 유행음악을 들려 줘야 즐거워했다. 좋아하는 음악과 연주해야 하는 음악 사이에서 송경운은 고민했다. 결국 송경운은 한 발 물러선다. “음악이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선인데, 내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송경운은 음악과 타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의 합일점을 찾았다. 진지한 옛 음악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거기에 최신 유행음악을 간간이 섞어 연주하였다. 대중의 요구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멋스럽게 조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송경운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져갔다. 서울에서의 인기만 해도 이미 최고였지만 전주에서의 인기는 그에 못지않게 치솟았다. 그의 문하에서 비파를 전수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져 73세로 타계하기까지 수십 명의 제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평생 음악가로 살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살았다. 그는 음악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자신의 존재이유는 곧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데 있다고 파악했다. 사람들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사람들의 귀에 음악을 맞추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혼자 갖추었어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다. 음악가 송경운은 사람들과의 조화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다.

 

 

세상의 영욕과 무관한 고집스런 한 길
또 다른 예술가를 보자.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을 때 만났던 예술가 장천용의 이야기다. 장천용은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서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가 손을 대기만 하면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비단 위에 산수山水나 신선, 새, 고목 등의 그림을 그리면 솜씨가 능란하여 그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붓끝이 섬세하고 정교하여 보는 이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청丹靑도 잘 그렸고 퉁소 연주 실력은 더 뛰어났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욕심에 소문을 내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장천용은 서슬이 퍼래져서 그들의 입을 막곤 했다. 세상에 자신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이름을 날리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었다.

한번은 장천용의 동료 가운데 부친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문상問喪을 갔다. 그런데 문상을 간 그에게 어떤 기막힌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니라 상주가 상복에 짚고 있는 지팡이, 곧 상장喪杖이었다. 장천용은 그 지팡이가 범상치 않은 물건으로 보였다. 지팡이로 악기를 만들어 불면 최고의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밤이 되자 몰래 그 지팡이를 훔쳐내었다. 그 대나무에 구멍을 적당히 맞추어 뚫어서 퉁소를 만들었다. 상을 당한 동료가 부친을 잃은 슬픔에 몸을 가누고 있을 그 지팡이를 훔쳐내 악기를 만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천용은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쉽게 만날 수 없는, 더없이 좋은 악기재료였다. 그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훔친 지팡이로 만든 퉁소를 가지고 태백산성(太白山城; 현재 황해도 평산군 산성리)이 있는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리고 밤새도록 퉁소를 실컷 불고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크게 나무랐다.

장천용은 이처럼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기인奇人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 너머의 사람이었다. 그가 연주할 수 있었던 악기는 퉁소 외에도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했다. 그의 손에 어떤 악기든 들어오게 되면 그 음악은 날개를 달았다. 간혹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 술값으로 썼지만 과하게 그리거나 과하게 받지는 않았다. 그날 벌어 그날에 맞게 쓰는 정도였다. 그는 재능을 숨기고 싶어 했던 천재 예인이었다. 재능이란 것이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겠는가만, 적어도 그는 유명세를 숨기며 조용히 숨어 살고 싶어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을 향한 자신의 고집스러운 열정을 아주 가끔 뿜어내는 일,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이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건 말건, 내 연주를 듣든 말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결국 그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예술을 향한 그의 고집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지켜 내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장천용의 고집, 그런 고집이 지금 이 시대, 어디에 남아 있던가?

 

글•송지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진•문화재청, 서울대학교박물관, 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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