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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한국 전통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조화, 성공회서울성당
작성일
2012-03-15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8428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220여 년이 되었다. 그 성장과정에서 전통문화와 충돌하고 혹독한 박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지난 1세기 동안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종교운동이 가장 활발하였고 교세가 급성장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 있는 건축물들이 많이 산출되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공존하는 관용과 조화의 한국종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꼽는다면 단연 순수 한국 전통양식의 목조건물인 성공회강화성당과 동서융합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주는 성공회서울성당이다

 

성공회서울성당의 개요
성공회서울성당은 국내 유일의 완전한 로마네스크 양식(두꺼운 벽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고, 아치와 수평을 강조한 교회 건축에 특히 많이 적용된 미술 양식) 건물로 내부 제단 모자이크와 공간구성이 뛰어난 건물이다. 국내에는 약현성당(1892), 명동성당(1898), 계산성당(1902), 전동성당(1914) 등 서양 중세양식의 교회건축물이 더러 있다. 대개가 성직자의 설계에 의해 절충 또는 변형된 양식이지만 성공회서울성당은 전문 건축가의 설계와 감독으로 국내에선 가장 로마네스크 양식에 충실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영국인 건축가의 설계에 의해 1922년에 착공하였으나 자금사정으로 인해 1926년 부분 준공하였으며 미완성인 채로 70여 년 사용하다가,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1994년에 증축공사를 시작했다. 1996년 기존 건축면적 532.5㎡에 626㎡를 증축한 총 1,158.5㎡(350평) 규모로 완공하였다. 애초 설계의 모습은 모델사진이 유일한 자료였으나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원 설계도면이 발견됨으로써 원래 계획대로 건축할 수가 있었다.

건축을 주도한 트롤로프 주교와 강화성당
성당을 구상하고 지휘한 사람은 한국 성공회 3대 주교인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1862~1930)신부이다. 성공회의 가톨릭 유산에 대한 회복과 보편성의 재확립을 중시한 19세기 옥스퍼드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학자적인 사제로 한국의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의 장을 맡아 한국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한국건축양식과 재료, 기후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였고, 한국의 전통문화와 융합할 수 있는 표상으로서의 성당건축을 추구하였다. 그의 첫 작품이자 토착화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성공회강화성당(1900년 건축, 사적 제424호)이다. 순수한 한식목구조로 서양의 바실리카식(삼랑식) 공간구성을 잘 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치 및 외부공간구성도 한국의 구릉지 사찰건축 배치기법을 잘 응용하였다. 서양교회건축의 전례와 상징성을 우리 전통건축 속에서 찾고 재해석함으로써 교회문화의 수용이 일방적인 서양문화의 이입이 아닌 주체적인 우리문화로의 수용이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옥이 가지는 기능적•구조적•공간적 잠재력을 확인시켜 주었던 기념비적인 건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가 상공회서울성당의 건축에서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택했는데 이는 교회의 발전과정과 교회건축양식과의 연계성을 볼 때 당시 한국 교회의 종교적인 깊이는 서양의 로마네스크에 해당된다고 보았으며 고딕 양식보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국적 풍토와 전통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계자 아더 딕슨
설계자 아더 딕슨(Arthur Dixon, 1856~1929)은 러스킨(Ruskin)과 모리스(Moris)의 영향을 받아 미술공예운동을 이끌었으며, 영국 왕립건축가학회 명예회원(FRIBA)이 되었고, 버밍엄 건축협회(Birmingham Architectual Association) 회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으며 특별히 종교건축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딕슨은 성공회서울성당의 설계를 위해 두 번에 걸쳐 내한하였으며, 준공 후 일부개조를 위해 내한한 1927년에는 『朝鮮と建築』에 기고한 글을 통해 그의 설계의도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는 건물의 전체 설계뿐만 아니라, 부분 준공을 위한 변경도면을 그렸으며, 지하성당의 제대와 촛대, 감실, 주교좌 등 모든 가구와 기물을 건물과 조화되게 직접 선정하거나 디자인하였다.

대성당의 배치, 구조와 양식
성공회서울성당은 영국 대사관 동측, 덕수궁 북측의 완만한 경사지에 제단을 동쪽으로, 출입구 정면을 서쪽으로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동측의 낮은 대지를 이용하여 지면과 동일한 레벨에 반지하 소성당(crypt)이 구성되어 있고, 그 위에 2개 층의 대성당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크고 작은 여러 매스가 위계적으로 조합된 이중 라틴 십자가형(Latin Cross)이다. 즉 2개의 라틴 십자가, 4개의 앱스(기독교의 교회당에서 밖으로 돌출한 반원형의 내진부), 4개의 출입구 아치, 중앙탑과 인접한 2개의 작은 종탑, 그리고 각 날개의 단부 모서리의 버팀벽(buttress)을 강조한 8개의 소탑 등 다양한 요소들이 위계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구조는 벽돌 조적구조이며, 외벽을 구성하는 마감재료는 화강석과 적벽돌이다. 강화도산(증축부분은 중국산)인 화강석은 기초부와 전후면 및 측랑 단부, 처마 밑이나 아치둘레에 쓰였으며, 적벽돌은 블라인드 윈도 등에 쓰이고 있다.

1층 대성당은 7개의 베이(인접하는 기둥과 기둥, 버팀벽과 버팀벽 사이에 끼인 1004 사적 제424호 성공회강화성당. 성공회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05 아더딕슨의 창호스케치와 클리어스토리 창. 06 성공회서울성당 외부 디테일.부분)를 가진 회중석, 외진外陳과 교차(crossing), 내진內陳, 그리고 1베이의 배랑(narthex)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 벽면은 열주의 아케이드와 상부측창 클리어스토리(clearstory)의 2단 구성으로 되어있다. 신랑(주임 신부가 상주하는 성당)의 폭은 측랑(교회 내부에서 측면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의 밖에 있는 복도)의 2배이며, 클리어스토리는 각 베이마다 5연 아치창인데 가운데 한 개씩의 작은 창만 뚫려있고 나머지는 블라인드 윈도(blind window)이다. 기둥은 엔타시스를 가진 화강암의 석주로 사각형 주초 위에 원통형 주신柱身, 그 위에 주두柱頭를 얹었다. 천장은 목조 왕대공 트러스이며, 측랑은 회반죽으로 마감된 그로인 보울트(groin vault)이다.

 

제단 모자이크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내부는 다양한 요소들의 조합으로 고딕양식에 비해 통일성이 결여될 수 있다. 그러나 성공회서울성당은 성단 끝의 제단 모자이크가 있어 전체의 초점이 되면서 강한 축을 형성한다. 성공회서울성당의 앱스는 반원형 평면에 수직벽면과 반구형 돔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체를 수직으로 3부분으로 나누었다. 돔 부분에는 한 손에 책을 펴고 계시는 그리스도 상 모자이크가 있고, 6개의 기둥에 의해 분절된 벽면의 5개의 아치공간에는 중앙에 성 모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성 스테파노와 복음서가 요한, 우측에 예언자 이사야, 맨 오른쪽에 대성당의 수호자인 성 니콜라오가 장식되어 있다.

한국적 정서가 깃든 성공회서울성당
성공회서울성당은 한국 전통문화에 조예가 깊은 주교와 영국인 건축가의 치밀한 계획 하에 설계 시공된 전형적인 앵글로 노르만 양식의 건물이지만 매스의 위계적인 조합과 처마의 서까래장식, 전통 격자 창살문양, 한식 기와지붕,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방색 등 한국 전통 건축 요소를 섞어 씀으로써 한국적 스케일과 풍토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위계적으로 조합된 외관매스와 공간구성은 서양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념인 “신을 영접하는 성채城砦, 보호와 초월적 열망을 지닌 하늘에 이르는 문”을 구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신비스런 경외감이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분위기보다는 인간적인 친밀감을 더 느끼게 한다. 그것은 소박한 재료와 구조의 솔직한 표현, 분절된 건축요소, 제단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 세부 디테일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영•일동맹)가 선교에 역작용하고, 영국교회의 지원 부족과 선교방법, 선교지 선택 등의 문제로 성공회의 양적인 성장은 둔하였지만 문화차원에서의 공헌은 높이 살 만하다. 일제말기 높은 문화의식을 가졌던 영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주교가 한국인으로 교체되면서 성공회 건축의 토착화된 면모나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글•김정신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사진•문화재청,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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