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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1,100년 전 고려를 열었던 왕건의 안식처
작성일
2017-10-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27

1,100년 전 고려를 열었던 왕건의 안식처 - 다가오는 2018년은 고려 개국 1,100주년이다. 근래 고려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왕조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왕조에 비해 고려는 우리에게 그리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고려의 문화와 문물의 중심이었던 개성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40여 년을 제외하면 약 430년 동안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 개경(開京) 또는 송도(松都)로 불렸던 이곳에는 많은 고려 유적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12개 유적군이 지난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고려 왕조를 열었던 태조 왕건(877~943)의 현릉(顯陵)이 포함된다.   정문에서 바라본 태조 왕건 현릉

왕건상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왕건의 안식처

개성 출신 호족의 아들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다가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었다. 그가 935년(태조 18)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듬 해 후백제를 무너뜨리면서 고려는 반란 왕조에서 정통 왕조가 되었다. 통일 왕조를 건설한 왕건은 67세에 세상을 떠나고 도읍 개경의 서쪽 만수산 남쪽 기슭에 묻혔다. 『고려사』에는 943년(태조 26) 6월에 장사를 지내었고 능 이름을 현릉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세계가 서쪽에 있다는 불교의 영향일까? 왕건의 능은 생전에 머물렀던 궁궐의 정 서쪽에 자리했다.

현재 현릉은 1994년 능 안팎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의 모습이다. 1992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발굴에서 현릉은 석실분(돌칸흙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석실은 단실이며 구릉 경사면의 반지하에 조성되었다. 규모는 남북 3.43m, 동서 3.1m, 높이 2.16m다. 석실의 동·서·북벽은 장방형의 화강암 판돌을 3~4개씩 세워 만들었고, 남벽은 동·서벽 양쪽에 잇대어 판돌을 1매씩 놓았다. 입구인 가운데에 나무문을 설치한 뒤 그 바깥을 화강암 판돌로 막았다. 천정은 고임돌을 놓고 그 위를 판돌로 덮은 1단 평행고임천정이다. 석실의 내부에는 가운데 관대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는 부장품을 놓는 대를 각각 설치했다.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가 남아있다. 동벽에는 매화와 대나무, 청룡이 서벽에는 소나무와 매화, 백호, 북벽에는 현무가, 천정에는 별이 그려졌다.

현릉의 외부는 보통의 고려 왕릉처럼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이전 가장 높은 1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에워싼 봉분과 석수, 혼유석, 2단에는 장명등과 석인상 1쌍, 3단에는 복원된 정자각과 비석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물론 발굴 이전 왕건릉의 모습은 원형과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릉은 고려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도굴로 파헤쳐 지고 한국전쟁 중 파괴된 것을 1954년에 복구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의 구조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외부 구조나 부장품은 후대에 변형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발굴 당시 석실에서 12~13세기 제작된 청자 잔이 발견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굴곡진 고려의 역사를 담은 왕건릉

1992년 10월 왕릉을 고치는 과정에 현릉 봉분 북쪽 5m 지점의 구덩이 속 화강암 판석 아래에서 청동상과 옥띠장식 등이 발견되었다. 약 140cm 높이의 이 좌상은 태조 왕건을 형상화한 것으로 왕건상이라 불린다. 왕건상은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나신(裸身) 위에 비단옷을 입고 금동과 옥 장식의 허리띠를 패용했다. 이는 고려가 황제국을 표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제의 보관을 쓴 태조의 상(像)이 현릉 옆 구덩이에 묻혀 있던 이유는 고려의 흥망과 관계가 있다. 왕건상은 광종 연간(949~975 재위)에 제작되어 태조의 진전사원인 개경 봉은사에 오랫동안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려가 망한 이후 더 이상 개경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방으로 옮겨졌다가 세종 때 이곳에 묻혔던 것이다. 옛 왕조의 자취를 폐기해야 하지만 태조의 상징물을 그냥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문신 성임(成任)의 시에는 이미 망해버린 왕조의 태조 현릉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아침에 서쪽으로 성문을 나가 우연히 현릉리(顯陵里)에 들어가니, 여조(麗祖)의 옛 능침(왕건릉), 돌 위에 큰 글자가 쓰여 있네. 상설(象設)은 반쯤 매몰되었고, 거친 풀은 어찌 이다지 우거졌는고. 밤이면 여우와 너구리가 모여들고 낮에는 까막까치 지저귀고 있네.”

고려 멸망 이전에도 현릉은 왕조의 굴곡진 역사와 함께했다. 1016년(현종 7)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의 재궁(관)을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로 옮겼다가 다시 묻었다. 1217년(고종 4)에도 몽골군에 쫓긴 거란의 잔적이 국경을 넘자 재궁을 봉은사로 옮겼고, 1232년(고종 19)에는 강화로 이장하였다.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뒤 1270년(원종 11) 임시로 강화에서 개경 이판동으로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외적의 손에 태조의 능이 훼손될까 이리저리 관을 옮겼던 것이다. 한 나라를 열었던 창업주의 숙명이었던 것일까? 왕건은 죽은 뒤에도 왕조와 명운을 같이 했다.

강화도에도 고려 왕릉이 있다

여몽전쟁 당시 강화로 옮겨진 태조의 재궁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지금까지 강화에는 고려의 왕릉이 남아있다. 이곳으로 천도했던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원덕태후 곤릉, 순경태후 가릉 등 4기의 왕릉과 묻힌 이를 알 수 없지만 왕릉급이 분명한 석실분이 몇 기 있다. 우왕과 창왕, 공양왕 등 묻힌 곳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개경에 있는 고려 왕릉을 남한에서 볼 수 있는 곳은 강화뿐이다. 이는 강화도가 40여 년간 공식적으로 수도 개경을 대체한 또 하나의 고려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강도(江都)라 했고 황도(皇都)로 인식했다. 홍릉을 제외하고 모두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강도 왕릉의 구조와 규모가 개경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대부분 도굴을 당했지만 질 좋은 자기와 구슬,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분단의 역사가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각각 남과 북에 속해 있지만 강화와 개성에는 공통적으로 고려의 왕릉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고려 왕릉은 단순히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미래의 남북 간 협력의 기제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글‧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사진‧정학수(강화고려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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