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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달콤 쌉싸래한 이국의 맛에 빠져들다 커피판매점
작성일
2013-12-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302

고종, 아관파천, 손탁호텔, 미스 손탁, 덕수궁 정관헌, 김홍륙의 독차
음모사건(Coffee Poisoning Plot). 이는 우리나라 근대시기 커피의 전래과정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와 명칭들이다.
아관파천 때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커피에 맛을 들인 고종이 경운
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가까운 손탁호텔의 여주인
미스 손탁(Miss Sontag)을 시켜 커피를 가져오게 하여 일종의 야외다방인
정관헌靜觀軒에서 이를 즐겼다 하는 그런 얘기들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 어느 것도 커피의‘첫’이야기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01. 대불호텔(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어진 3층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판매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피의 전래시기에 관한 오해와 진실

가배나 가비(茄菲)로 표기되는 커피(coffee)가 처음 이 땅에 상륙한 때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찾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근대 개항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기록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그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그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는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가 남긴『조선풍물지(1888)』가 있다. 여기에는 그가 1883년 11월에 파크스공사 일행에 합류하여 서울에 당도했을 때, 박동(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따뜻한 커피(hot coffee)’를 얻어 마셨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미국군함 주니아타호의 해군군의관 조지 우즈가 남긴 일기장에도 1884년 3월에 정동의 미국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시고 조선군대의 병영지를 찾아 나선 얘기가 남아있다.

이것 말고도 퍼시벌 로웰의『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는 1883년 12월에 서울 한강변의 어느 정자에서 조선 관리들로부터 최신수입품인 ‘식후 커피(after-dinner coffee)’를 얻어 마셨다는 흥미로운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흔히‘언더우드 부인’으로 알려진 릴리아스 호톤언더우드는 1889년 봄에 관서지방으로 떠난 신혼여행에 대한 회고담을 남기면서‘명백히 최고 부자인 사람들조차 최근에야 겨우 차 또는 커피를 마시는 것을 배웠으며, 여느 사람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그것을 살 형편이 되질 못한다’고 하면서 그 즈음 부유층 사이에 이미 커피를 마셔본경험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해준바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더라도 커피는 개항 당시의 시점부터 서양인들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궁중으로 커피가 유입된 시기도 아관파천보다 훨씬 빨라

이러한 상황은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명한 지리학자인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에는 1895년 초에 그가 왕비를 알현하면서 커피를 곁들인 서양식 요리를 대접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으며, 이보다 훨씬 앞서 미국인 여의사 애니 엘러스벙커는 1886년 가을에 명성황후를 첫 대면하여 진찰한 때의 회고담을 적으면서 대기실에서 차와 커피를 얻어 마신 일을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커피의 등장은 아관파천 시절이 아니라 그보다 10여 년 이상이나 빠른 시점에서 이미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02. 커피의 첫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으레 언급되는 손탁호텔의 전경.하지만 이 호텔이 등장한 때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미 커피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흔적은 무수히 발견된다.

전차의 등장과 맞물려 진행된 커피의 대중화

그렇다면 일반인들에 의해 커피를 마시는 일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때는 도대체 언제쯤이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영문판 독립신문인《디 인디펜던트》1899년 8월 31일자에 수록된 광고에 윤룡주라는 사람이청량리홍릉앞에서양식요리점을개업하였다는내용가운데‘커피’가 판매품목으로 포함된 사실이 주목된다. 그리고《제국신문》1900년 3월 3일자에도조원규라는사람이내건‘홍릉정거장좌우편요리집’의 광고문안에도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1899년 전차개통과 아울러 새로운 명소로 부각된 청량리 전차종점 일대는 일반 대중들이 커피의 맛을 경험하는새로운창구역할을하는공간으로자리매김하고있었던것이다. 또한《황성신문》1900년 11월 26일자에 수록된‘송교松橋청향관淸香館’광고에는‘가피차加皮茶파는 집’이라고 스스로 소개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가피차’는 곧‘커피차’이므로 청향관은 일종의 다방茶房인 셈이다. 이것으로 보면 적어도이시기에 이르러 커피라는 존재는 이미 일부 계층의 독점물이거나 전유품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대중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로 등장한 무수한 카페와 끽다점(喫茶店)은 커피가 새로운 사교문화의 촉진제로 확실히 뿌리내리도록 작용하는 공간적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실상 커피는그누구랄 것도 없이 서양인들의 도래와 더불어 훨씬 이른 시기에 이 땅에 전래되었으며, 또한 대불호텔이나 손탁호텔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각보다는 매우 이르게 이미 우리네의 일상생활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치 한국 여행객들의짐보따리에 필시 김치나 고추장 한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듯이 근대개화기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인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생활필수품이자 오랜 기호품의 하나로 커피 한통쯤은 으레 자신의 여행가방 속에 담겨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소장) 사진. 이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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