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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라 진흥왕의 통일 염원을 담은 순수비
작성일
2021-02-2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963

신라 진흥왕의 통일 염원을 담은 순수비 진흥왕 하면 고구려 광개토왕과 비견할 만한 정복군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진흥왕은 재위 12년(551) 왕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법흥왕 때의 ‘건원(建元, 536~550)’이라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과의 교통로 확보를 위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여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동북방면으로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영토인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크게 넓혔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01.추사 김정희가 북한산 비봉에서 발견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문화재청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진흥왕과 진흥왕순수비

신라 진흥왕(534~576, 재위 540~576)은 백부이자 외조부인 법흥왕(재위 514~540)이 아들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일곱살에 신라 제24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34년간 재위하였다. 진흥왕 6년에는 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가야에서 건너온 우륵을 국원성에 정착시키고, 가야금을 제작·연주하게 하는 등 예악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다. 또, 왕실 사원인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고, 불교를 신봉해 두 아들을 전륜, 동륜으로 이름짓고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하는 등 불교 진흥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는 오늘날 북한지역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꼭대기에 세운 ‘황초령비’와 이원군 운시산 꼭대기의 ‘마운령비’를 비롯하여, 남한의 북한산 비봉에 세운 ‘북한산비’와 창녕 봉화산에 세운 ‘창녕비’를 일컫는다. 창녕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3기의 비문에는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을 순행한다는 뜻의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어 ‘순수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반면, 창녕비의 경우에는 모두(冒頭)에 ‘순수관경’이라는 제명(題名)이 없어 땅을 넓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뜻의 ‘척경비(拓境碑)’로 명명되었는데, 이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들어 순수비로 보는 의견이 있다.


진흥왕순수비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에는 전해지지 않고, 조선시대 문헌기록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한백겸:韓百謙, 1547~1629)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에 황초령비에 대한 내용이 전해져 왔을 뿐이었다. 순수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조선말 금석고증학자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다.


김정희가 북한산 비봉에서 북한산비를 발견하여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정하고 난 이후 사서와 고증을 거치는 과정에서 황초령비의 존재를 파악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1900년대 초 최남선에 의해 마운령비가 비로소 세상에 소개되었으며, 일본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창녕읍 화왕산 기슭에서 창녕비를 발견하고 조선총독부에 보고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02.상태가 양호해 비문을 판독할 수 있는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국립문화재연구소 03.비봉에 있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복제비 ©문화재청 04.척경비로 명명되어 있는 화왕산 기슭에서 발견된 창녕비 ©문화재청

진흥왕순수비의 발견과 의의

진흥왕순수비의 발견은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 연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후대인 고려시대에 편찬되어 한계를 품고 있는 것에 비하면 금석문은 거의 대부분 당대에 쓰여진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조(眞興王條)에는 신라의 동북국경을 비열홀주(碑列忽州,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安邊))로 기록하고 있는데 황초령비의 발견으로 안변을 훨씬 넘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석이 발견된 초기에는 일부 일본 사학자(史學者)들이 비석의 내용을 믿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근대 일본 동양사학의 실증적 연구를 대표하는 사학자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는 이 비가 원래 철령(鐵嶺) 고개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시대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城)을 쌓을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운령비가 발견됨으로 인해 이러한 견해들은 근거를 잃고 말았다. 황초령비는 마운령비와 더불어 진흥왕대 신라의 동북 국경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다. 마운령비는 진흥왕순수비 중에서는 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비문을 판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황초령비와 북한산비가 마모와 결실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은 점을 보완해 주고 있다.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은 진흥왕이 정복한 지역을 순수하고 그것을 기념한 사실과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善政)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에서 진흥왕은 ‘태왕(太王)’이나 ‘짐(朕)’으로 자신을 호칭하여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여 제왕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영토를 순행하면서 민심을 살펴 노고(勞苦)를 위로하고,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와 새로 확보한 지역의 백성들이 왕국을 위해 충성하고 공헌하는 이들에게는 관직과 물질적 보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순수에 동행한 사문도인 법장과 혜총, 거칠부를 비롯한 많은 관직 신료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 재위 시 영토를 확장한 것을 대내외에 알리고 새롭게 확보한 지역의 민심을 달래며 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요구한 것으로, 왕도정치의 이념을 알리는 교화의 성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05.진흥왕조의 영토가 함흥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한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국립문화재연구소 06.진흥왕대 신라의 동북국경을 증명하는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진흥왕순수비의 보존관리 실태

4기의 진흥왕순수비는 그것이 소재한 지역에 따라 지금은 남과 북에 각각 2기씩 나뉘어 있다. 북한에 소재한 황초령비는 추사가 발견했을 당시부터 파손되어 있던 것으로, 비석의 일부는 없어지고 조각난 3개의 편을 접합하여 놓은 상태다. 현재의 지대석은 후에 보완한 것이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원래 있던 소재지를 벗어나 지금은 함흥본궁 내 함흥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각기 북한 국보유적 제 110호와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원래 비가 있었던 마운령과 황초령의 옛터도 북한 보존급유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남한에 있는 북한산비는 북한산 비봉의 거대 자연암반을 2단의 계단식으로 다듬어 좌대를 높여 비신을 끼울 수 있도록 바위를 뚫어 제작하였다. 원래는 머릿돌이 있었으나, 아래로 떨어져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비는 오랜 세월 낙뢰와 폭우 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비문은 거의 마멸되어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좌대의 전면 서남측 일부가 파손되고 비신 좌측 하단부가 깨져 떨어져나가고 상부가 가로로 갈라져 흔들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거기다 비석의 뒷면에는 한국전쟁 때 받은 수십 발의 총상 흔적으로 보존상태가 열악하였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오늘날 문화재청의 전신)은 북한산비의 훼손 진행을 방지하고 보존관리를 위해 1972년 8월 25일 비석을 비봉에서 경복궁 내 근정전 회랑으로 옮겼으며, 원래 있던 자리에는 복제비를 설치하고 표지석을 세워 사적 제228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로 관리하고 있다.


이후 원래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국보 제3호). 창녕비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글자 새긴 면을 다듬어 비석을 만들었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지금의 자리인 창녕군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국보 제33호).


진흥왕의 통일 염원을 담은 순수비의 남북 공동 연구 기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복제과정에서 비석에 사용된 암석을 분석한 결과, 비석에 사용된 화강암의 산지가 신라의 수도 경주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연히 비석의 제작지에 대한 문제도 새롭게 제기되었다. 경주산 화강암을 사용하여 북한산 비석을 제작하였다면, 경주 화강암을 가지고 가서 현장에서 비석을 제작하였다는 의견과 경주에서 비석을 새겨 현장으로 옮겨 세웠을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암석산지는 과연 어딜지 궁금해진다. 이렇듯 진흥왕순수비의 실물을 통한 연구는 비단 석재산지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주제로 연구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묻혀 있는 역사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남북이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 박대남(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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