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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만주에 펼친 한민족의 기상
작성일
2015-03-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469

880년대 초 대학 수업에서 한 교수가 “우리 민족의 정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그때 한恨’을 정답으로 제시했다. 청일·러일 전 쟁,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매번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수긍할 만했다. 하지만 그 ‘한’의 정서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동시에 기술강국, 한류라는 거대 문화를 이끄는 대한민국을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으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사는 반만년 역사라 말하지만 실제 우리 국민들이 체감하는 역사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종속되어 살았던 조선의 역사다. 그 종속된 500년 의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가 ‘한’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족정서의 표상이 될 수 없다. 실상은 우리가 잊고 사는 4,500년의 역사, 특히 만주 지역에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속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명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취적이고 도전적 기상이다.

고조선, 중국이라는 거대세력에 맞선 진취적 기상

우리 민족사의 처음은 BC 2333년 건국하여 BC 108년 에 멸망한 ‘조선’이다. 그런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임에도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으나 위서로 단정 지어져, 이를 근거로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인『한서漢書』에 등장하는 우거대왕의 모습에서 고조선의 기상이 어떠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700년 간 분열된 중국을 진시황이 통일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혼란기를 평정하고 중국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였다. 한무제는 한나라 최고의 정복군주였다. 그는 타클라마칸 너머까지 영토를 넓혀 실크로드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강한 종족이었던 흉노족마저 공략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팽창에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고조선이었다. 한무제는 전통적 강국인 고조선 때문에 쉬이 패권을 완성할 수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한무제는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무례한 행동을 하여 처 형 된 섭하의 죽음을 트집 잡아 고조선을 공격했다. 이 때 고조선의 임금이 우거대왕이었다. 한나라 장수는 위청이었는데 그는 흉노족을 점령했던 백전노장이었다. 그러나 우거대왕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오히려 한나라 군을 기습 공격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대승을 거뒀다. 한무제는 이 패배 이후 한동안 고조선에 전 혀 대항 못하였다. 그러나 권토중래하던 한무제는 다시 군사를 모아 고조선을 재침공한다. 그는 이번에는 육전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곧바로 평양성으로 들어와 성을 포위했다. 1년 동안 이어진 공방전에서 고조선 군은 한나라 군을 상대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속된 전쟁 에 염증을 느낀 일부 권신들에 의해 우거대왕은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평양성은 함락당하고 고조선은 망하게 된다.

실패했지만 우거대왕의 삶을 살펴볼 때 고조선 사람들의 기상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 에 결코 굴복하거나 꼬리 내리지 않았고 도전적으로 맞섰던 것이다.

01. 백암산성. 고구려 성의 웅장한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성으로, 당태종 이세민이 침공했을 때 성주 손벌음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연합콘텐츠 02. 압록강철교. 북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연합콘텐츠

고구려, 민족의 기상을 떨친 영웅들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나라도 오래 가지 못해 위·촉·오 삼국으로 분열된 이후 약 400년 간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큰 혼란기를 겪게 된다. 이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이다. 통일된 중국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에 큰 위협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와 그의 아들 양제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끊임없이 군대를 보냈다. 특히 양제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100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결국 을지문덕 장군이 지휘한 고구려의 육군과 고건무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이로 인해 결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군을 2,300여명만 남기고 몰살시킨 전투는 세계전쟁사에 길 이 남은 큰 승리이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혼란한 중국을 다시 통일한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당나라를 세운 이 연 의 아들 이세민이다. 그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돌궐을 점령했을 뿐 아니라 히말라야산맥 동쪽, 고비사막 남쪽의 천하를 당나라의 영토에 편입시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다. 이런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대의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을 때 고수전쟁의 영웅이던 고구려의 영류왕 고건무마저 두려워했다. 이 때 당나라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인 사람이 연개소문이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당나라의 압력에 굴복하는 고구려 내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 후 당나라 이세민에게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훗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우는 말갈기병대, 토착 세력인 연나부의 양만춘 등은 물론 동돌궐의 진주가한과도 연합하여 사방에서 당나라를 압박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세민 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선봉에 세운 부대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아사나사마가 이끄는 돌궐족 기병대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 역사책에는 그들이 출전했다는 기록만 나올 뿐 그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돌궐기병대는 연개소문이 이끄는 말갈기병대에게 전멸했는데 이를 숨긴 것이다. 또한 고구려 수군기지였던 비사성을 점령한 당나라 수군 오만명 또한 평양성을 향해 항해를 했는데 역시 그 이후의 행적 역시 알 수 없다. 이세민 또한 백암산성과 요동성을 점령한 후 안시성을 공략하다가 양만춘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의 반격을 받아 결국은 패배하여 돌아간다. 중국 최고의 영웅인 이세민은 죽을 때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구려와 수나라,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이 두 전쟁은 오늘날로 말하면 1, 2차 세계대전 급의 전쟁이었다. 중국과 고구려가 전력을 기울여 싸운 큰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자, 이런 영웅들은 중국의 의도에 의해 폄하되고 왜곡되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영웅들을 바로 아는 것, 그것이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의 뿌리를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03. 장군총.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으로 서울의 백제석총, 산청의 구형왕릉무덤과 형식이 유사한 것으로 동북공정을 반박할 수 있는 주요한 유물이다. ⓒ박혁문 04. 두만강 하류의 북한과 중국 훈춘 지역을 잇는 다리. 이 다리를 통해 중국의 물자가 북한으로 들어간다. ⓒ박혁문

발해, 대륙에 떨친 해동성국의 기개

발해사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해동성국’이라는 말 정도뿐 그 알맹이는 대부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 시 발해에 대적할 나라가 없었기에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한민족 최고의 정복군주인 발해 2대 임금인 무왕 대무예이다.

『구당서』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으로, 『신당서』에는 속말말갈 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발해를 여진역사로 분류한다. 하지만 발해가 세워진 지역은 백산부, 속말부말갈족들이 사는 지역임에는 틀림없으나 발해를 세운 지배세력은 분명 고구려인들이다. 대무예가 일본과 국교를 맺을 때 보낸『일본서기』에 전해지는 문서에 따르면, 당시의 사신들은 대부분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인이며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손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버지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가 발해의 2대 왕으로 즉위하자 당나라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부말갈을 이용했다. 이들은 단 한번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부족인데, 당나라는 추장 아속리계를 뒤에 서 조종하여 발해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대무예의 장안성 입조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대무예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산부말갈을 공격하여 끝내는 그들을 발해의 백성으로 삼았다.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고구려의 옛 영토인 요동지역을 회복한 후 당나라 정벌군을 꾸려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 해군기지인 산동성의 봉래성을 공격, 산동성 일대를 점령한다. 당나라에서는 발해에 맞서기 위 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동성은 발해의 영지로 남 게 된다.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당나라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끝내 당나라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 역사책에는 장문휴의 공격을 해적떼의 약탈로 묘사하여 왜곡하고 있다.

한편, 산동성 대부분을 뺏긴 당나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게 한다. 이 에 신라는 김사란을 지휘관으로 삼아 삼만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하였지만 이들은 대무예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이 두 전투 이후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어 300년 간 평화를 누리게 되고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정복군주로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 때보다 실은 더 넓은 영토를 개척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의 대명사 대무예,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의 뿌리로 당당히 존재하는 그가 해적의 일원으로 폄훼되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바르게 알고 재조명해야 할 민족기상

우리 민족의 정서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라고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전범이 될 만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역사관이 한반도와 근래의 역사에만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구려와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대무예,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등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의 뿌리가 되는 조상들이 중국인이 되어 사라져 가는 것에 무관심한 것도 원인일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지역과 이들의 활약상을 말하고 가르쳐야만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이다.

 

글. 박혁문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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