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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녀평등한 사회, 분재기로 실현하다 보물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작성일
2023-09-2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6

남녀평등한 사회, 분재기로 실현하다 보물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장자 중심의 재산 상속과 제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7세기 초반까지는 균분상속과 윤회봉사의 방식이 되었으나 17세기 중반부터 장남이 재산을 상속받고 제사를 지내도록 변화하였다. 이 양상은 분재기(分財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00.아버지가 딸에게 증여하는 별급 문기, 보물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1564년, 종이, 39.5×56.5cm, 개인소장 ©문화재청

문서로 기록된 재산 분배, 분재기

조선 전기까지는 고려시대의 재산 상속 제도와 제사 방식이 유지되었다.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부모의 생전에 나눠주지 않은 노비는 자녀의 생몰과 관계없이 나눠준다”라고 하여 남녀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상속인과 피상속인에 따른 상속분을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적용된 문서는 분재기이다. 분재기란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토지·노비 등의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여 준 문서이다. 작성하는 목적은 유산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과 상속 및 분배 후 일어날 수 있는 재산 분쟁을 방지하는 데 있다. 분재기는 상속 대상자 수만큼 작성해 각자 보관하였으며, 분재기에는 재주(財主)·보증인·집필자의 이름과 서명을 표기하였다.


분재기의 내용에는 봉사조(奉祀條)가 포함되었다. 봉사조는 제사를 받드는 데 쓰기 위해 별도로 떼어둔 재산 항목으로 집안에서 제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이를 통해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으면 조상제사도 공평하게 지낸다는 원칙을 알 수 있다.


16세기, 차별 없이 상속받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의 선조들은 처가나 외가를 구분하지 않았다. 딸이 혼인하면 사위가 처가살이를 하거나, 분가하여 딸의 부모와 같은 마을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장인은 딸과 사위를 위해 집을 마련해 주고 토지와 노비도 주었다. 또한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과 사위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부안김씨 종중의 사례를 살펴보면, 김경순(金景順)은 1564년(명종 19) 10월 24일에 강주신(姜周臣)의 딸과 혼인하였다. 강주신은 딸이 혼인하자 결혼 당일 딸에게 논과 노비를 증여하였고, 처삼촌 강주보(姜周輔)는 조카사위인 김경순에게 논을 증여하였다.


1564년의 두 별급(別給) 문기를 살펴보면 강주신이 50세가 되도록 딸이 혼인하지 않다가 결혼하게 되자 크게 축하하는 의미로 딸에게 노비 한 명과 논 14마지기를 증여하였다. 또한 자식이 없던 강주보는 자신과 같이 살면서 효성스럽게 봉양한 조카딸이 결혼하게 되어 조카사위인 김경순에게 논 16마지기를 증여하였다. 사위인 김경순이 증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경순 부부가 강주보 내외(內外)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17세기까지 사위는 처가에서 그 집안의 아들과 똑같이 재산상의 권리를 누렸고, 제사의 의무를 가졌다. 따라서 사위가 처가의 터전을 이어받거나 딸과 사위를 포함한 외손도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흔했다.


01.처삼촌이 조카사위에게 증여하는 별급 문기, 보물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1564년, 종이, 48.0×54.0cm, 개인소장 ©문화재청

17세기 중반, 적장자 중심으로의 변화

조선 전기를 거쳐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균분상속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은 후 예학(禮學)이 발달하면서 조상에 올리는 제사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고, 여성들의 평등권을 박탈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제 출가한 여성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하지 않았으며, 출가외인의 개념이 강화되어 더이상 친정 제사를 번갈아 지내는 윤회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장자 중심의 가치관이 강화되어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게 되었고, 서자는 제사와 재산 분배에서 배제되었다. 기유년 11월 11일 후손에게 전하는 문서는 다음과 같다.


여자는 출가한 다음에는 곧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되어 지아비를 따르는 의리가 무겁다. 그러므로 성인이 예의를 제정함에 등위를 낮춘 것이다. 그런데 정(情)과 의(義)가 모두 가벼워져, 세간의 사대부 집안에서 제사를 사위의 집안에게 윤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항상 보건대, 사람들의 사위와 외손 등이 제사를 미루거나 빠트리는 경우가 많다. 비록 하더라도 제물이 정결하지 않거나 예의가 공경스럽지 않아 도리어 행한 것만 못하다. … 여자는 토지와 노비를 3분의 1만 나눠준다. 이는 정과 의에 전혀 불가할 것이 없으니, 여자 및 외손들은 어찌 감히 이 뜻을 어기고 분쟁할 마음을 품겠는가.


이 문서는 김명열(金命說)이 1669년(현종 10)에 사위와 외손들이 제사를 미루거나 빠트리는 경우가 많고, 예의가 공경스럽지 않기 때문에 종가에서만 제사를 지내도록 후손에게 당부하는 문서이다. 김명열은 제사 봉행과 재산 분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마련하였으며, 현실적인 필요보다는 예의를 이유로 내세웠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장자 중심의 재산 상속 및 봉사제가 확립된 것이다.


고문서의 가치와 의미

부안김씨 종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는 6종 80점이며, 1986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가운데 분재기는 17세기를 전후로 나타난 재산 분배 방식이나 제사 봉행 방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애정 이야기, 조상에 대한 효 이야기, 지극한 자식 사랑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분재기를 통해 부안김씨 가문의 경제 사정은 물론, 당시 가족 제도와 사회 구조, 사회 변동까지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문서는 당시 사회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들이 무궁무진하게 담긴 보물 창고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고문서가 지정 문화유산이 되어 잘 관리되면서 우리 조상들의 과거를 환히 비춰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 이아름(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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