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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아있는 전쟁박물관, DMZ를 가다
작성일
2010-06-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42




지뢰에 묻힌 한반도 역사

“43일 동안 경험 없는 병사들과 함께 실시하는 지뢰 제거작업이 매일 이어졌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작업이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고, 또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2000년 3월, 당시 육사 교수였던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은 DMZ 남방한계선 안에 있는 강원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471m) 안에 방치됐던 성산성을 조사할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10년간 육사박물관 등과 함께 조사한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는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었다. 연구소 등이 조사한 ‘군사보호구역’은 군사분계선(휴전선) 이남 25㎞ 범위 이내 지역과 군사시설의 최외곽 경계선으로부터 500m 범위 이내 지역(취락지역은 300m)을 이르는 말이다.  

그 결과 이른바 ‘군사보호구역’에서 모두 660건의 문화유적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 처음 확인된 유적만 해도 242건이 된다. 필자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의해 그어진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방한계선(군사분계선에서 남북 2㎞), 민간인통제구역(민통선ㆍ군사분계선에서 10㎞이남), 군사보호구역과 함께 접경지역(민통선 이남으로부터 20㎞이남)을 ‘DMZ 일원’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2007년 2월부터 2009년 4월까지 2년2개월간 이재 선생과 이우형씨 등 이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이른바 ‘DMZ 일원’에 대한 답사에 나섰다.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이어야 할 곳이 세계 최강의 ‘중무장’ 지대이고, 민간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곳을 답사하다 보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도 겪었다. 길을 잃고 미확인 지뢰지대에 접어들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사무사한 잡초길을 뚫고 밤이 되어서야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를 담당한 조사단의 고초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DMZ 일원의 유적과 주변의 풍경은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있다. 지금은 이북 땅 강원도 평강의 오리산鴨山에서 흘러내린 용암은 2억평에 이르는 현무암 평야(철원평야)를 만들었고, 문명의 젖줄인 임진강과 한탄강을 뚫어주었다. 약 3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은 선사시대 고속도로를 따라 문명을 낳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지난 1977년 고고학을 전공한 주한 미군이 발견한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은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곡리 발굴은 동아시아에서는 유럽-아프리카와 달리 이런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없다는 모비우스의 가설을 뒤덮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30만 년 전으로 측정되고 있다. 이후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이런 구석기 유적은 20여 곳이나 줄줄이 확인됐다.

오리산이 흘려놓은 용암대지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흐르게 했고, 야트막한 구릉지대와 드넓은 평야지대를 낳았다. 구석기 이후에도 이 일대는 강을 모태로 삼은 사람들의 터전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반도 제패의 야망을 품은 남북세력은 한반도를 반으로 가른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도읍으로 삼았다. 아직 확정된 설은 아니지만 임진강변에 붙어있는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은 백제 창업주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고구려 유리왕을 피해 남하하여 정착한 최초의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인근에는 횡산리 적석총을 비롯해 삼곶리, 삼거리, 우정리 1, 2, 동이리, 학곡리, 전곡리 적석총 등이다. 최근에는 경기 연천군 군남댐 수몰 예정지에서 기원 전후(초기 백제) 철제품을 생산하던 ‘제철 마을’이 발굴된 점, 또 인근 강내리에서 역시 초기백제 주거지 74기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경작 유구와 수혈 유구 131기, 고구려시대 고분9기 등 총 218기에 달하는 유구가 확인됐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이른바 ‘DMZ 일원’의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역시 후삼국시대 궁예가 쌓은 ‘태봉국도성’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강원 철원군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르면 해발 220~330m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감상할 수 있다. 그곳은 현재 누구도 갈 수 없는 DMZ 안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지천사이, 얕은 풀밭 사이로 어렴풋이 태봉국 도성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바로 905년 ‘영원한 평등세계를 꿈꾸며 철원 풍천원 들판에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며 도읍을 정한’ 궁예의 보금자리였다. 지금은 남북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이 도성을 완전히 반으로 가르고 있다. 포천~철원~평강 주변에는 궁예의 전설을 담은 문화유산이 널려있다.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은 물론 궁예의 무덤이 있다는 삼방협三防陜(평강과 안변 사이) 등이다. 파주 문산의 임진나루는 조선 선조가 1592년 4월30일 백성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임진강을 건넌 곳이다. 지금은 군부대 안에 있다. 선조가 몽진길에 오르자 백성들은 “나라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구를 믿고 살란 말입니까?”라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임진강 하류, 북쪽에서 초평도를 바라볼 수 있는 파주 군내면 정자리에는 방치된 채 흔적만 남아있는 덕진산성이 있다. 지뢰를 제거했다지만 이리저리 답사에 나서기에는 좀 뜨악한 곳이다. 이곳은 장단부사 이서李曙(1580~1637년)가 이끄는 반란군 700여명이 은밀하게 훈련을 벌인 뒤 1623년 3월12일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곳이다.

육군사관학교 조사팀이 지뢰지대를 뚫고 개척한 김화 성산성과 생창리 일대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2대 승첩(용인 광교산 전투와 김화지구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묻은 곳이 바로 전골총戰骨塚이다. 이 전골총은 DMZ 안쪽에 있는데, 철책에서 100m도 되지 않는 곳에 있어 손에 잡힐 듯하다. 무덤 꼭대기에는 나무 한그루가 400년 전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서있다.

 

믿음의 성지

강원 고성 건봉사는 1500년 성상을 쌓은 호국불교의 성지이다. 이곳은 758년 발징 스님이 1만일(27년 5개월 가량) 동안 수행한 만일선원萬一禪院을 연 이래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이른바 만일염불회가 열린 곳이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사명대사가 전국 각지에서 승병 700명을 모아 이곳에서 조련한 뒤 평양성-개성-한양 수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필자와 이우형씨가 금강산 끝자락 향로봉 중턱에 자리 잡은 건봉사 소속 보림암을 답사하러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 미확인 지뢰지대로 빠진 곳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폭삭 주저앉은 보림암의 흔적을 찾기는 했지만 일행은 절망에 빠진 발걸음으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미 칠흑으로 변한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본사(건봉사)로 내려올 수 있었다. 경기 연천과 포천 관인, 강원 철원과 동송에 걸쳐있는 거대한 보개산 군群의 하나인 환희봉(해발 877m) 정상 바로 밑에 터만 덩그러니 남은 석대암石臺庵을 찾는 길고 멀고 험했다. 이 암자는 지장신앙의 성지이다.

때는 바야흐로 720년 신라 성덕왕 19년. 사냥꾼 형제가 금빛 멧돼지를 보고 힘껏 활을 쐈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고 도망갔고 형제가 그 혈흔을 추적하니 그곳이 바로 환희봉 쪽이었다. 그런데 멧돼지는 간 곳 없고, 샘물 가운데 머리만 살짝 내놓은 석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석상의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형제는 크게 두려워해서 외쳤다.

“대성大聖이시여! 우리를 속계의 죄에서 구해주시려고 이런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대성의 뜻에 따라 출가하겠나이다.”

다음날 와보니 석상은 바로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형제는 곧 300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암자를 창건하고는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는 그 위에서 정진했다. 이 멧돼지는 바로 지장보살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 심원사(철원 동송)에 봉안된 석상의 왼쪽 어깨에 화살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5년 2월 경기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DMZ 남방한계선 안쪽에서 돌로 만든 불상이 발견됐다. 1사단 모 대대 주임원사가 눈을 치우다가 지뢰지대 안쪽 저 멀리에서 사람 같은 물체를 본 것이다. 지뢰탐사반을 불러 통로를 개척한 뒤 가보니 그것은 5m가 넘는 불상이었다. 불상은 몸통과 머리가 떨어진 채 있었다. 이것이 읍내리 석조여래 입상이다.

 

삶과 죽음의 공간

‘비무장 지대 일원’에는 한때를 풍미한 인물들이 잠들어있다. 철책을 호위 삼아 총탄 6발을 맞은 비석을 두고 잠들어있는 신라 경순왕릉(연천 고랑포)가 대표적이다. “백성들을 다 죽일 수 없다”면서 나라를 들어 귀부한 경순왕은 한마디로 ‘승리한 패배자’였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43년간 더 살았고, 태조 왕건보다도 35년이나 오래 살았으니까. 또 그의 후손들은 “고려 현종 이후 왕통을 이은 사람이 모두 경순왕의 자손들”이라고 했던 김부식의 말처럼 경순왕 계열의 김씨는 번성에 번성을 거듭했다. 이밖에도 고려시대 벽화가 발견됐고, 발굴과정에서 묘주인이 바뀌어 버린 파주 서곡리 벽화묘와, 대제국 원나라를 쥐락펴락한 기황후의 묘로 전해지는 연천 상리 ‘전傳 기황후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위대한 은둔자인 이양소 선생묘(연천군 중리),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에 희생양이 됐지만, 결국 청나라 파병군 장수로서 금나라 군과 싸워 장렬하게 산화한 김응하 장군묘(철원군 대외리) 등도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전해준다. 특히 출생연도와 유배지, 그리고 사망지까지 모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조선시대 의성醫聖 허준묘(파주 장단면 하포리)의 발견은 드라마틱하다. 서지학자 이양재씨가 ‘양천 허씨 족보’에서 단서를 잡아 민통선 이북지역인 하포리를 샅샅이 뒤지다가 마침내 도굴된 어떤 무덤에서 두 쪽으로 동강난 명문비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 명문은 바로 ‘양평陽平 성공신聖功臣 준浚’이었으니 말이다.




전쟁의 추억

누누이 강조하지만 DMZ 일원을 반으로 가른 임진강과 한탄강은 백제-고구려-신라는 물론 당나라 등 외국군대까지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기 위해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던 요처혔다. 한국전쟁 때는 남북한을 포함한 19개국 젊은이들이 이른바 ‘제3차대전의 대체전’을 치렀다. 특히나 전쟁기간(1127일) 가운데 2/3(764일)을 DMZ 일원에서 싸운 특이한 전쟁이었다. 지루한 고지전이 이어졌다. 또한 전쟁은 3년 여 만에 끝났지만 휴전협정에 따라 ‘완전한 비무장지대’여야 할 이곳은 ‘중무장지대’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살아있는 전쟁박물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일대를 답사하다보면 고대와 현대 전쟁이 중첩된 전쟁유산을 무시로 만날 수 있다. 638~675년 사이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 간 혈전이 벌어졌던 경기 파주 적성 칠중성(148m)은 대표적인 국제전쟁터였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영국 간 처절한 국제전이 펼쳐졌다. 1952년 4월22일, 중국군은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가 주둔한 칠중성을 밀고 들어온다. 글로스터 대대는 그야말로 ‘낫으로 풀을 베듯’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뿔피리와 꽹과리를 불고 치며 달려드는 중국군의 대공세를 막지 못하고 6시간 만에 후퇴한다. 영국인들은 이 칠중성을 ‘캐슬고지’라 불렀으며, 지금도 해마다 4월이 되면 현장을 찾아 이 전쟁의 추억을 기린다. 675년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야욕을 좌절시킨 매소성買肖城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비정되는 경기 연천 대전리大田里 산성 인근은 한국전쟁 때도 치열한 전장으로 변했다. 대전리 산성에서 바라보이는 3번 국도로 북한군 주력부대인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이 남하했다. 지금 이 대전리 산성에는 성벽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하고 얻은 관미성關彌城 터는 경기 파주 오두산성 통일전망대 자리에 있다.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는 58성과 700촌을 잃었으며, 이후 힘을 펴지 못하고 결국 475년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만다.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부에 자리 잡은 관미성 터는 지금도 북한군을 감시하는 철통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백제의 영역이던 DMZ 일원은 관미성 전투 이래 고구려군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남진정책을 편 고구려는 남하루트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瓠蘆古壘 같은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축조했다. 특히 이 호로고루 일대는 얕은 여울 지역이어서 남북 세력의 도강장소로도 적합했다. 그랬으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전차부대는 개성~문산을 통하지 않고 20㎞나 우회하여 이곳 호로고루 여울목을 통해 도하했다. 고구려군의 기마부대가 건넜던 곳이 북한 전차부대의 도하장소가 된 것이다. 1998년부터 고구려군의 최전방 사령부였던 호로고루에 대한 발굴결과 401m에 이르는 성의 둘레가 확인됐고, 2,000평에 이르는 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엄청난 양의 고구려기와가 확인됐다.


 

전쟁유산들

한국전쟁 때 DMZ 일원에서는 남북한은 물론, 미국, 중국, 영국, 터키, 호주 프랑스군은 물론 태국, 필리핀,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 군까지 5대양 6대주 병사들이 피를 흘렸다. 특히 한국전쟁은 DMZ 일원을 중심으로 펼친 고지전이 특징이었다. 지루한 고지전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고지 이름도 쏟아졌다. 티본스테이크처럼 생겼다는 ‘티본 고지’(연천)와 ‘포크찹 고지’(돼지 갈비뼈를 닮았다 해서), 육체파 배우(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김화의 ‘제인러셀 고지’등…. 또 저격당하기 일쑤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 그리고 피바다가 되었다는 ‘피의 능선’,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단장의 능선’ 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또한 중국군은 1951년 8월부터 52년 12월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총연장 250~280㎞, 폭 20~30㎞였고, 참호와 교통로까지 합한다면 총연장 4,000㎞에 이르는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을 쌓았다. 총면적은 5,000~7,000㎢에 이른다. 중국은 이 지하만리장성 ‘덕분에’ 이른바 삼감령(삼각고지+저격능선)전투에서 유엔군에게 궤멸적인 손실을 가했다고 자랑한다. 이밖에도 전쟁으로 산화한 유엔군의 넋을 태웠던 유엔군 화장터(연천 미산면 동이리), 전쟁통에 폭파된 채 방치된 경의선 증기기관차(장단면 동장리),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동원으로 건립된 철원 노동당사, 남북한이 교대로 저마다의 공법으로 완성한 승일교 등이 이른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또한 DMZ 일원 고처(112.5㎢)에 깔린 지뢰지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전쟁유산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60년이 흘렀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우여곡절을 겪었고, 또 겪고 있지만 이 일대는 분단과 전쟁, 냉전의 상징에서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나야 한다. 정부나 각 지자체는 이제야 지금에서야 DMZ 관련 연구들과 관광 및 개발계획이 봇물처럼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일대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감성적 접근이 주를 이루고 기껏해야 ‘생태계의 보고’라고 인식하는 수준이다. 이곳에 방치된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무런 이야깃거리 없이 그저 DMZ 일대를 걷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부터는 DMZ 일원의 역사를 한줄기로 엮어내어 ‘통사通史’로 만들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글·사진 | 이기환 경향신문 부국장(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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