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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별기획 문화유산 다시보기 (서울편)
작성일
2006-03-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580

3·1운동의 진원지 ‘북촌’

중앙고보 숙직실 복원
<중앙고보 숙직실 복원>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준 ‘저항의 공간’ 역사와 함께 했던 공간, 그러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늘상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역사적 현장성·문화적 공간성을 찾아내 그에 걸맞는 의미를 담아낼 때 그 공간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존재의 가치를 갖게 된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서울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조선인’과 점령자로서의 ‘일본인’이 뒤섞이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이남 쪽은 주로 일본인들의 주거지였으며, 이북 쪽은 조선인들의 근거지였다. 특히 종로는 이북 식민지 조선인의 공간을 대표하는 거리로써 재탄생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종로를 비롯해 그 배후지에 있었던 북촌이 3·1운동 시기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누가 주도하였으며, 왜 일어났는지 역사와 공간적 시각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북촌, 그 역사적 위치 현재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동편 계동 현대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에 이르는 남북축의 일직선 진입로는 3·1운동의 발상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역사 공간이다. 북촌지역은 예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는 조선성리학에 기초하여 배치된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조선후기 북촌은 노론을 비롯한 집권층이 몰려 있던 곳으로 당대의 권세와 부를 쥐고 흔들던 곳이며, 궁궐·관청·교육기관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기거한 운현궁이 있었으며, 갑신정변의 거사도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갑오경장에 의해 신분제 폐지 이후 북촌은 다소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수송동 82번지에 ‘각황사’가 창건되고 안국동에서는 양반들의 개신교회인 ‘안동교회’가 세워진다. 또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중앙총부가 생겼으며, 한성중학교 등 신식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거점으로 북촌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일제하에는 민족지도자들의 주된 거처로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간적 규정성으로 인해 종로와 그 배후지 북촌은 일제하 3·1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족·사회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처음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학생세력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추진되다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을 중심으로 운동의 일원화를 이루어내면서 급류를 탔는데, 그 주요 거점이 바로 종로와 그 배후 주거지였던 북촌北村이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도심주거형 한옥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 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3·1운동과 그 역사적 공간들 3·1운동, 거사준비의 시작 - 중앙고보 숙직실 터 안국역 2번 출구에서 나와 계동의 한옥집들을 지나다보면 정면에 중앙고등학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정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편에 6·10만세운동 기념비와 나란히 서 있는 <삼일운동책원지>라는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이 기념비가 있던 자리가 바로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책원지로서 숙직실이 있던 자리다. 1919년 1월 중순,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의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에게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 독립선언서」 기초를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다. 기념비 뒤 북쪽으로는 학교 담장가에 당시의 모습대로 숙직실 건물이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숙직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으며, 중앙고등학교의 옛 건물들이 공사 중인지 몰라도 그 안은 창고 용도로 쓰여지는 듯 했다. 1937년에 준공한 본관과 서관·동관 건물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3 ·1운동의 초기 조직화 - 보성고보 교장 최린의 집 당시 보성고보 교장이었던 천도교계의 중진 최린의 집(현 헌법재판소 구내 동북쪽)을 중앙고보의 교사 송계백이 방문하여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움직임을 보고한 것을 계기로 최린·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이 여러 차례 회동을 하면서 거사를 모의한 장소이다. 그들은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1월 말부터 2월 초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할 민족대표를 교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교섭을 받은 박영효·윤용구·한규설·김윤식 등 대한제국 시대 중요한 관직을 갖고 있던 명망가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첫 접촉 - 계동 김성수의 거처

3ㆍ1운동 책원비
<3ㆍ1운동 책원비>
민족대표를 모으는 일이 난관에 부딪친 일행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거사를 준비하게 되는데, 천도교계는 중진인 최린의 합류로 별 문제가 없었으나, 기독교계는 새로운 인물을 모색해야만 했다. 가장 적당한 인물이 평안북도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는 이승훈 장로였다. 최남선에 의해 접촉을 하게 되고 1919년 2월 11일, 계동 김사용의 집 김성수의 거처에서 최남선 대신 나온 송진우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이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거사할 뜻을 비추자 이승훈 장로는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하게 된다. 즉 이 장소는 별개로 추진되었던 독립운동의 거사 준비를 일원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장소가 된 셈이다. 김사용의 집 동편에는 1923년 무렵부터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옛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고등학교 앞길 대동상고 진입로 옆집에 위치해 있으며, 북촌 한옥마을에서 대표적인 문화공간일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관련하여 역사적인 건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 채 한 쪽 귀퉁이에 쓸쓸히 자리 잡고 있다. 불교계의 합류로 민족대표 골격이 완성 -한용운의 거처

3ㆍ1운동 당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이 간접적으로 접혹한 김성수의 거처가 있던 자리
<3ㆍ1운동 당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이 간접적으로 접혹한 김성수의 거처가 있던 자리>
2월 11일 이승훈과 송진우의 회동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거사 단일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후 송진우가 운동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되자 서로 간의 연락이 두절되고 만다. 이에 기독교 측은 단독 거사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월 21일 이승훈과 최린의 회담이 전격 성사되면서 또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2월 24일,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과 함께 현재 송현동 덕성여중 자리에 있던 천도교 중앙총부로 손병희를 찾아가 양측의 독립운동 일원화 방침을 최종 확정하게 된다.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을 이루어 낸 최린은 유심사唯心社에 기거하고 있는 만해 한용운 스님을 찾아가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는다.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유심사는 중앙고등학교 진입로변 중앙탕 옆골목 두 번째 집으로 앞서 김성수의 거처에서 중앙고등학교 쪽으로 50m쯤 올라간 지점에 있다. 이곳은 30평 남짓한 초라한 한옥집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1918년 9월에 월간지 『유심』을 3월호까지 발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3·1운동 거사준비의 매듭 - 손병희 집터

각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된 유심사 자리
<각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된 유심사 자리>
3·1운동 거사 전날,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상견례를 겸해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최종 합의 장소로 정해진 손병희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석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경우 그 심각한 파장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됨에 따라 장소는 결국 탑골공원에서 일제의 한국 강제합병 당시 매국노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 먹은 역적모의 장소인 ‘태화관’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역적 모의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도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독립을 갈망하던 민들과 괴리된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며 적절한 처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가회동사무소 바로 옆에 한의원과 음식점을 비롯하여 그 뒤편의 민가까지 800여 평에 이르는 면적이 바로 손병희의 집터이다. 3·1운동 그 햇불을 들다 3월 1일 오후 2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인사동 154번지 태화관에서 거행하게 된다. 만해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일제경찰에 연락해 모두 잡혀가게 된다. 그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운집한 가운데 별도의 독립선언식이 진행된다.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이 공원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의 시발점을 이루게 된다. 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비폭력적이란 이름 아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같은 시각 우리의 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한 달여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이 끝난 후 모두 체포되었다. 만약 그들이 민들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해 나갔다면 3·1운동은 또다른 양상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단어는 없다. 지금 와서 누가 잘못했고 이렇게 행동하였음은 좀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지만 최소한 민족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수많은 민들과 함께 행동하지 못한 행위는 잘못된 역사의 오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또한 최린을 비롯한 적지 않은 민족대표들이 이후 친일로 전향한 사실은 3·1운동 당시 행적을 되새겨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취재 / 이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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