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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과 문화재
작성일
2006-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82

완초장莞草匠 이상재 선생의 50년 인생 씨줄과 날줄로 엮어간 완초장莞草匠 이상재 선생의 50년 인생

가족과 함께 작업중인 이상재 선생
<가족과 함께 작업중인 이상재 선생>
푸름의 기세가 등등해지기 시작하는 오월 중순이었다. 강화대교를 지나면서 머릿속으로 굴곡 많았던 강화도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 강화는 수많은 외침을 겪었던 땅이다. 일본과의 조약으로 쇄국의 빗장이 풀리면서 식민역사의 치욕이 시작된 곳도 역시 강화도가 아닌가. 강화읍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강화 보건소 옆으로 자그마한 소형 아파트가 보였다. 그리고 완초장 이상재 선생 못지않은 완초공예솜씨를 자랑하는 부인, 유선옥 여사가 미리 나와서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올해 나이 예순넷, 소아마비 장애인이신 이상재(무형문화재 제103호) 선생은 첫눈에도 한길로만 살아온 장인 특유의 외부인에 대한 수줍음이 뚜렷해 보였다. 아파트 거실 한쪽 벽은 그동안의 업적으로 기록된 상장과 인증서들 가득 걸려있다. 이윽고 거실 바닥으로 화문석이 깔리고 선생의 작품들이 가득 펼쳐진다. 꽃삼합, 사주단자, 동구리, 보석함, 반짇고리… 모양의 아름다움과 그 섬세함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그 외에도 최근에는 가방, 모자, 악세서리 등 새로운 제품 개발에 열정을 쏟고 계셨다. “모양이 둥근 제품은 초보자들도 만들기 쉬워요. 하지만, 사각은 어렵지. 왜냐하면 어떤 틀이 없기 때문에 눈대중으로 작업해야 하거든. 한참 만들다 보면 각이 틀어지거나 위, 아래의 비율이 안 맞기가 십상이지.” 과연 내놓은 물건 중에는 정교하게 짜인 팔각 함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는 제품이 몇 가지가 안 되었지, 여기 있는 것 중의 대부분이 새로 개발해낸 것이야.” “꽃삼합 한 세트를 제작하는데 하루 열 시간씩 해서 꼬박 열흘이 걸려요. 수십만 번의 손길을 거쳐 만든 제품값을 최소한 사, 오십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비싸다고들 아무도 안 사.” “완초제품은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두 겹으로 짜야해. 3년은 배워야 겨우 방석 정도를 만들 수가 있는데 앉아서 이걸 만든다고 최소한의 인건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누가 이걸 배우려고 하겠어요. 이제 여기도 완초제품을 만드는 이가 서너 명밖에 안남았지” 이것이 바로 완초장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이상재 선생의 섬세한 작업 모습
<이상재 선생의 섬세한 작업 모습>
완초란 우리말로 왕골이라고도 하는데, 줄기가 삼각으로 1~2m 가량 되는 백색의 일년생 사초과 식물이다. 전국적으로 서식하지만 강화지역의 완초가 부드럽고 촉감이 좋아서 최고로 친다. 전남 함평 지역의 왕골제품은 완초줄기를 한 가닥으로 사용하는 반면, 강화도의 완초는 한 줄기를 여러 개로 짜개어 만들기 때문에 매우 섬세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원래 완초공예는 강화 교동도라는 섬이 발상지로서 집집이 완초제품을 생산했다고 한다. 남자들도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우내 식구들과 함께 제품을 만들었다. 이상재선생 역시 교동 출신으로 14세에 어머니로부터 완초공예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제품의 인기가 좋아서 부업의 수준을 뛰어넘었고 교동의 소년, 소녀들은 진학마저 포기한 채 완초공예에 뛰어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상재 선생은 배운지 3년 만에 교동 최고의 완초공예 솜씨를 자랑했고 화문석이 강화도의 명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제품생산과 함께 완초공예 기술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한 때의 영화는 너무나 짧았다. 플라스틱 제품이 보급되면서 완초제품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저가의 중국산 완초제품이 수입되면서 완초장의 명맥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젠 젊은 사람 그 누구도 배우질 않아 큰일이야, 맥을 잇기가 어려워졌어.” 어두운 표정의 선생에게서 깊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최근에는 전반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나아져 5월만 해도 남북한 교류전, 한일 바스켓 트리 전 등 여러 차례의 행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고 했다. 인터뷰도 많이 들어오지만 TV 취재는 거절한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삼사일간, 촬영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이 찍었는데, 결국 나오는 건 한 오 분, 십 분 정도인 거야. 그러니 이제는 찍고 싶지 않은 거지” 순박함에 미소가 절로 난다. 완초장 기술 전수생인 부인, 유선옥 여사 역시 1999년 공예대전에서 완초로 만든 다과세트로 대통령상을 받아 스승인 이상재 선생에게 보람을 안겨주었다. 따님도 배운지 6~7년가량 되는데 이제는 제법 잘 만든다고 했다. 세 식구가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겨운 모습이다. 물질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일에 대한 자부심과 아울러 식구 간에 넘쳐나는 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각박함이 새삼 서글퍼졌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고 편리함과 실용주의의 시대가 지나면 결국 사람의 땀방울이 밴 제품이 진정으로 작품이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얘기를 드렸더니 이상재 선생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예전에 비해 염료와 디자인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필자가 보기에도 향후 상품적인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예전만 해도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살림살이였던 완초제품을 오늘에 다시 보니 장인의 정성과 땀이 완초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50년간 줄기차게 이어져 온 완초장 인생, 이상재 선생은 오늘도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딸과 함께 앉아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엮고 계셨다. 글 _ 편집실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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