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처음 물리친 역사현장 정읍 황토현 전적
작성일
2023-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4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처음 물리친 역사현장 정읍 황토현 전적 1894년 4월 7일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는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의 승리였다. 농민군이 정규군인 관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는 풍문이 떠돌 만큼 전봉준과 농민군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01.황토현 고갯마루에 우뚝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투 승리와 그 전후 이야기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무고하게 옥에 갇힌 농민들을 풀어주고 강탈당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줬다. 농민들의 분노와 원성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도 무너뜨렸다. 탐관오리 조병갑은 부리나케 도주했고,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은 폐단의 시정을 약속하며 농민들의 해산을 종용했다.


고부군수의 약속을 믿고 농민들은 해산했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 농민봉기에 가담한 농민을 색출한다며 무고한 농민을 잡아들이거나 재산을 빼앗는가 하면 부녀자들을 능욕했다. 전봉준은 무장(전북 고창군 무장면)으로 이동해 무장접주 손화중과 태인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과 합세했다. 그들은 3월 20일에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투쟁을 선언했다. 이 ‘무장기포’는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확산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무장에서 기포한 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전라도 여러 고을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백산(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머물렀다. 하얀 무명옷을 입은 농민군들이 손에 죽창을 든 모습에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추대했다. 총사령부 격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4대 명의 및 12대 기율과 백성들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동학농민군이 백산에 모였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전라감영의 관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급히 출동시켰다. 이 일대의 지형에 익숙한 농민군들은 관군들을 황토현으로 유인했다. 4월 6일 관군들은 황토현 부근에, 농민군들은 맞은편의 사시봉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관군의 야간 기습을 예상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진지에 허수아비를 세우거나 나뭇가지에 흰 옷가지를 걸쳐 위장하고 농민군들을 주변에 매복시켰다. 4월 7일(양력 5월 11일) 새벽, 전봉준의 예상대로 관군이 농민군의 텅 빈 진지를 기습하자 매복한 농민군이 일제히 나타나 역습을 가했다. 농민군은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관군의 뒤를 쫓아 관군 진지까지 대파했다. 


그날 파죽지세로 정읍까지 점령한 동학농민군들은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나주 등을 잇달아 점령하고 장성으로 향했다. 한편,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중앙군(경군)은 전라감영군이 황토현에서 대패한 4월 7일에 군산을 거쳐 전주에 도착했다. 농민군을 뒤쫓아 온 홍계훈 부대는 4월 23일 장성 황룡강에서 동학군을 급습했지만 장태를 방탄도구로 활용한 농민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전주로 진격을 시작한 농민군들은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하기에 이른다.


02.제민당 내에 봉안된 전봉준 장군 영정 03.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의 황토현 전적지와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우뚝한 두승산 너머에 고부관아가 있었다.

선을 압도하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 조각상

황토재’로도 불리는 황토현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나직하게 솟은 고개이다. 정상 높이가 해발 35m에 불과해서 고개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고갯마루에는 1963년에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서 있다. 기념탑 주변의 석판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녹두장수 울고 간다’는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에 무심코 불렀던 노래가 여기서는 진한 울림을 안겨준다. 기념탑 아래의 비탈에는 동학농민군들의 위패를 모신 구민사, 새롭게 조성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전봉준 장군의 영정이 봉안된 제민당, 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다.


04.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 전시실에 내걸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초상화 05.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600여 명의 농민군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가로 30m, 세로 20m 크기의 광장에 새로 들어선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이다. ‘불멸-바람의 길’이라 이름 붙여진 이 대형 조각상은 2022년 6월 25일에 완공됐다. 한가운데에는 결연한 표정의 전봉준 장군이 갓을 벗어 오른손에 움켜쥔 채로 앞장서 나가고, 그 뒤에는 다양한 계층의 동학농민군 10여 명이 따른다. 사람 ‘인(人)’ 자 형상으로 좌우에 배치된 화강암 벽의 ‘1·2차 봉기 행군상’에는 무려 600여 명의 농민군을 대단히 사실적인 기법의 부조와 투조로 표현했다. 


원래 이곳에는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김경승의 친일행위가 밝혀지면서 1987년에 세워진 그의 작품에 대한 철거 요구가 빗발쳐 결국 2021년 9월에 철거됐다. 새 조각상은 조각가 임영선의 작품인데, 전국 635개 단체와 5,149명이 기탁한 성금 2억 2,571만 원을 포함해 총 13억 7,984만 원이 투입돼 만들어졌다고 한다.


06.1893년 11월 고부 주산마을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서명한 사발통문 07.황토색 건물의 동학농민혁명박물관과 6가지 색깔의 돌로 만든 ‘농민의 벽’

새롭게 조성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생생한 역사 체험

1981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정읍 황토현 전적’의 면적은 16만 4,658㎡(4만 9,809평)에 이른다. 황토현과 사시봉 일대의 넓은 들과 구릉에 걸쳐 있는 황토현 전적에는 지난해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인 5월 11일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문을 열었다. 기존의 동학혁명기념관 이외에도 황토색 건물의 동학농민혁명박물관(전시관 및 추모관), 상징조형물인 ‘죽창결의’,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한 ‘농민의 벽’, ‘울림의 기둥’과 ‘기억의 들판’, 사발통문광장, 녹두장군캠핑장 등의 새로운 조형물과 편의시설, 추모공간 등이 조성됐다.


08.동학혁명기념공원에 줄지어 늘어선 '울림의 기둥‘.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전국 90개 지역과 동일한 숫자만큼 세워진 조형물이다. 09.화승총을 겨누며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동학농민군상.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에 있다.

오래전에 문을 연 동학혁명기념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모든 사건과 역사를 정리한 문서와 유물, 시청각 자료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당시 농민군이 사용한 화승총과 장태 등과 옛 모습을 그대로 되살린 복장이나 농민군 인형 등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에 문을 연 동학농민혁명박물관은 크게 추모관과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영상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화승총을 든 동학군과 최신식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을 사용한 일본군의 비교 영상을 시청할 때는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나서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자료와 전시물들이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현재진행 중인 것처럼 실감나게 다가온다.


가볼 만한 곳 정읍 전봉준 유적(사적)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살았던 옛집으로 정읍시 이평면 조소마을에 있다. 태어난 곳은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로 알려져 있다. 몰락한 양반의 후손인 전봉준은 조소마을에서 농사 지으며 동학 고부접주와 마을 훈장을 맡았다. 1878년에 지어진 원래 집은 고부봉기 직후에 관군이 불태웠고, 현재의 집은 1974년에 복원됐다. -정읍 전봉준 유적 정읍 고사부리성(사적) 옛 고부관아 뒤편의 성황산 정상(132m) 주변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길게 뻗은 반달 모양이다.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영조 40년(1764)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 성곽으로 활용됐다. 성벽 길이는 1,050m이며, 조선시대의 성문터 3곳과 우물 1곳이 확인됐다. -정읍 고사부리성 정읍 만석보지(전라북도 기념물) 동진강과 정읍천의 합수 지점에는 원래 근처 농민들이 쌓은 ‘예동보’가 있었다. 하지만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예동보 바로 아래쪽에 만석보를 새로 쌓았다.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1마지기에 쌀 1~2말의 수세를 걷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민란을 일으켰다. -정읍 만석보지 국가유산 방문하고, 선물 받으세요! 가장 한국다움이 넘치는, 신비로운 우리 국가유산을 함께 만드는 길에 동참하세요. <문화재사랑> 6월호 ‘둘러보기’ 코너에 소개된 정읍 황토현전적에 방문해 6월 16일까지 인증 사진을 보내주세요. 두 분을 선정해 선물을 드립니다. QR코드를 찍으면 이벤트 참여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인증사진을 첨부해 보내주세요. ※ 국가유산에 따라 출입이 제한된 곳도 있습니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된 곳은 절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글, 사진. 양영훈(여행작가, 여행사진가)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