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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란 속에서 지켜 낸 초상화 보물 <서경우 초상>·<서문중 초상>
작성일
2023-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9

전란 속에서 지켜 낸 초상화 보물 <서경우 초상>·<서문중 초상> 오늘날까지 전하는 우리의 옛 그림 중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초상화이다. 2022년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회화 문화유산 가운데 일반 회화류가 150여 점이 되는데, 그중에서 초상화가 81점으로 과반을 차지한다. 성리학을 추종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조상이 계신 듯’ 정성껏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살아생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제작해 지극히 모셨다. 조상에 대한 공경의 마음과 후손들의 애틋한 노력 덕분에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많은 초상화가 안전하게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 00.보물 〈서경우 초상〉, 견본 채색, 175.4×98.9cm, 개인 소장 01.보물 〈서문중 초상〉, 견본 채색, 155×103.2cm, 개인 소장

얼굴 피부 표현의 묘사가 사실적인 <서경우 초상>

서경우(徐景雨, 1573~1645)의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이다. 그는 광해군 4년(1612)에 정주 목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아버지 서성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10년간 은퇴했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인조를 호위하며 따라갔고 대사간, 대사헌, 이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에는 형조 판서로 성절 겸 진하사(중국 황제의 생일이나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보낸 축하 사절)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는 우의정이 되었고, 70세에 기로소(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공신 초상의 화풍으로 그려진 〈서경우 초상〉은 오사모(烏紗帽)에 흑색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을 입은 좌안 칠분면 전신 교의 좌상(左顔七分面全身交椅坐像, 왼쪽 얼굴이 많이 보이는 의자에 걸터앉은 전신상)으로서 쌍학흉배(雙鶴胸背, 한 쌍의 학을 수놓은 사각 표장)를 하고 있다. 초상화 속 서경우의 얼굴은 40대쯤 되어 보이는데, 41세 때인 광해군 5년(1613) 3월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훈공이 문서에 오르면서 그려 받은 초상화로 추정된다. 다른 익사공신들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서경우 초상〉의 특징은 사모의 높이가 낮고, 단령의 옆트임이 직선으로 떨어진 점,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소매로부터 무릎 부분에 이르기까지 평면으로 처리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얼굴 피부 표현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채색을 꼼꼼하게 올린 점에서 궁중 화가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이 엿보인다. 그런데 임해군 역모 사건을 처리한 공을 세웠던 익사공신들은 이후 인조반정으로 훈공이 삭제되었다. 이 경우 공신에게 내린 교서는 물론 초상까지 국가에서 수거하여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익사공신 가운데 임장(任章), 윤효전(尹孝全), 윤승길(尹承吉)의 공신 초상들처럼 서경우의 공신 초상도 운 좋게 소각을 면했던 것 같다. 서경우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우의정까지 지낼 수 있었듯이 그의 초상화도 사라질 운명을 피해 오늘날까지 온전히 살아남아 보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개성 넘치는 얼굴, 섬세한 수염이 돋보이는 <서문중 초상>

공무를 볼 때 입던 옷인 시복본(時服本) 차림 초상의 주인공은 서문중(徐文重, 1634~1709)이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서경우의 손자로, 자는 도윤(道潤), 호는 몽어정(夢漁亭),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증조부가 바로 서성이며, 친조부는 서경주(徐景霌), 친아버지는 남원 부사를 지낸 서정리(徐貞履)이다. 서문중이 당숙 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관찰사 역임)에게 입양되었으므로, 서경우가 그의 양조부가 되었다. 서문중은 효종 8년(1657)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현종 14년(1673)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청도 군수·이천 부사·상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숙종 6년(1680)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당상관에 올랐고, 예조 참판·도승지·공조 참판·공조 판서·훈련대장·형조 판서·병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는 거듭된 환국(換局)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있다가 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농가 구제 방안을 마련한 공을 세워 169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이후 좌의정을 거쳐 1699년부터 세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경제 및 군사 제도에도 조예가 깊은 서문중은 『조야기문(朝野記聞)』, 『상제례가범(喪祭禮家範)』, 『병가승산(兵家勝算)』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서문중의 초상화는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을 착용하고 삽은대(鈒銀帶, 조선시대 정삼품의 벼슬아치가 띠던 허리띠)를 두른 전신 교의 좌상으로, 교의에는 표범 가죽이 덮여 있고, 족 좌대에는 민무늬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림 상단에 적힌 제목 ‘영의정몽어서공화상(領議政夢漁徐公畫像)’에 따르면, 서문중이 66세로 영의정에 오른 1699년에 그린 것이 되는데 얼굴에 표현된 눈가의 주름과 검버섯에서 세월의 흔적이 잘 느껴진다. 또한 개성 넘치게 그린 얼굴과 한 올 한 올 그려낸 수염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데, 특히 길게 자라 삐져나온 하얀 눈썹을 통해서 초상을 그린 화공이 얼마나 사실적인 묘사에 주력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종가에는 서경우, 서문중의 초상과 함께 그림을 보관했던 영정함도 전한다. 두 점 모두 조선 중기에 제작된 초상화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된 가품(佳品)에 속한다.


초상화를 지켜 낸 후손들의 노력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두 초상화의 보존 상태가 좋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은 종손을 찾아뵙고 바로 풀렸다. 대구 서씨 약봉 서성 15대 종손인 서동성(徐東晟) 씨는 초상화의 정기조사를 나온 우리를 아흔이 넘은 부모님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그날도 약봉 선생의 묘역과 사당 주변을 손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매일 일과처럼 빠지지 않고 기울이는 정성 덕분에 종택 옆에 위치한 묘소는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소소한 규모였지만 깔끔하게 단장된 약봉 선생의 사당과 재실(齋室)을 둘러본 후 초상화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이 광경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종손께서는 6·25전쟁에 얽힌 초상화의 사연에 대해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한탄강을 건너려는 유엔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민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성 선생의 종택을 지키던 사람들은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조상의 초상화였다. 그들은 4척(1.2m)이 넘는 커다란 영정함 두 개를 수레에 실은 채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 길을 떠나는 식으로 목숨을 건 피란길을 택했다. 대대손손 내려오던 종택 건물은 인민군사령부로 사용되다가 미군의 폭격을 맞아 전소되었으며, 수백 년간 그곳을 지키던 노송들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만약 초상화를 두고 피란을 떠났다면 조상의 초상화 두 점도 불에 타 사라졌을 것이다. 전쟁 통에 이들이 겪은 고생 덕분에 초상화가 온전한 상태로 남을 수 있었다.


종손과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양친 두 분은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었다. 아흔을 넘긴 고령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으며, 무심히 일상을 보내는 모습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말년까지 두 분 모두 건강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조상을 향한 지극한 마음과 그로 인한 조상의 은덕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 박윤희(국립문화재연구원 연구기획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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