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지역주민이 공유하며 다가서는 자연유산의 진정한 가치 명승 <단양 사인암(丹陽 舍人巖)>
작성일
2023-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2

지역주민이 공유하며 다가서는 자연유산의 진정한 가치 명승 <단양 사인암(丹陽 舍人巖)> 충북 단양에 가면 2008년 9월 9일에 명승으로 지정된 사인암이 있다. 남한강 지류인 남조천 변에 깎아지른 듯 바위가 웅장하게 직벽을 이루어 마치 병풍처럼 세워져 있는 명승지이다. 사인암은 고려 말 초기 유학자이며 역학자인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이 사인(舍人, 고려 종4품 관직) 벼슬을 지낼 때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하여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林霽光)이 우탁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인암이라는 이름을 바위에 명명하였다고 한다. 02.사인암

사인암이라는 이름의 기원이었던 우탁 선생

사인암이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널리 알려지기까지 지역주민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사인 벼슬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아 사인암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우탁 선생도 그 공헌자 중 한 명이다. 우탁 선생은 단양 우씨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면서 민간신앙을 타파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고려 충선왕 복위년(1308)에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재위 1308~1313)이 부왕인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의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였으며, 이후 숙창원비는 충선왕을 미혹하여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다.


이때 종6품 감찰규정(監察糾正, 지금의 검찰)이던 우탁 선생이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를 하였다. 지부복궐상소란 백의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거적자리를 깔고 임금의 잘못된 일에 대하여 행동을 고치도록 진언을 한 후 말이 잘못되었다면 목을 쳐도 좋다는 가장 강력한 상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선조 22년(1589) 조헌(趙憲, 1544~1592) 선생과 고종 13년(1876)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이 나라의 국운을 걱정하여 목숨을 걸고 지부복궐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는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 선생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경은 근신이면서도 주상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행을 하시게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 죄를 아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충선왕도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우탁 선생은 연로하므로 예안현(禮安縣)으로 은퇴하였는데,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우탁 선생 설화에서 영해사록에 부임하였을 때 백성들이 팔영신을 믿고 그 사당에 자주 제사하고 많은 제물을 바치자 팔영신을 요괴로 단정하고 방울을 부수어 바다에 빠트렸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만 살려두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당고개 서낭(마을의 수호신)이라고 한다. 또 『주역』을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녔는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계속 울면 멸종시키겠다고 글을 보내자 개구리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 달라고 하였으며, 호랑이도 사람을 해치자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였다고 한다. 


이는 민간신앙을 누르고 유학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우탁 선생의 학문과 왕에 대한 충신의 기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후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조선시대 단양군수를 지내었던 이황(李滉, 1501~1570)도 우탁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창건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01.김홍도의 사인암도

지역주민과 공존을 통해 지켜지는 자연유산

사인암 관련 기록은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사인암」 시(詩)와 정선(鄭歚, 1676~1759), 김홍도(金弘道, 1745~1810?), 이방운(李昉運: 1761~1815?)의 「사인암도」 등에 남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수직절벽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양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절벽암 곳곳에는 선현들의 각자(刻字) 200여 개가 있다 하며, 너럭바위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조선의 명망가들과 풍류객들이 시를 짓고 먹을 갈며 신선처럼 놀다 머물렀던 사인암 바로 앞에 사인암리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청호녹음도」, 「경송초루도」, 「삼척능파대」 등을 그린 화가이며 문인이었던 이윤영(李胤永, 1714~1759)도 1753년에 서벽정(棲碧亭)을 이곳에 짓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사인암리 마을 사람들은 고관대작 등 명망가들이 올 때마다 뒷수발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기암절벽에 인위적인 각자를 새기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을 때마다 사인암리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풍류객들을 대하였을까?2008년 명승으로 지정된 뒤에는 푸른 절벽에 새긴 선현들의 마음을 느끼고자 많은 탐방객이 찾는가 하면 여름에는 물놀이하기 좋은 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예전에 농업이 주 수입원이었던 사인암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 펜션 등을 지어 도심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면서 관광수입이 주가 되었다. 선조들이 명망가들의 뒷수발을 수행했던 어려움을 이제야 보상을 받는 마음일까?


사인암이 명승으로 지정된 다음해인 2009년 7월 16일에 비행선을 띄워 사인암 항공촬영을 하러 갔을 때 사인암리 마을 아주머니 두 분이 나오셔서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분은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칡즙을 들고나와 건네고, 또 한 분은 박카스 4병을 주면서 항공촬영을 잘해서 사인암을 널리 알려 달라고 하였다. 2022년 여름에 간 사인암은 많은 휴양객과 탐방객들로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사인암리 마을 사람들은 주차 정리를 하랴, 물놀이 안전을 지키랴 정신이 없었지만 짜증 섞인 표정과 말투는 볼 수 없었다. 깨끗한 사인암리 마을과 사인암을 보면서 자연유산의 가치는 시대를 넘어 지역주민과 공존을 통해 지켜지고 보존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된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선생의 「탄로가(嘆老歌)」이다.


一手杖執又(일수장집우) 한손에 막대 잡고
一手荊棘握(일수형극악) 또 한손에 가시를 거머쥐고
老道荊棘防(노도형극방) 늙는 길 가시로 막고
來白髮杖打(래백발장타)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自先知(백발자선지) 백발이 제 먼저 알고,
近來道(근래도) 지름길로 달려오더라.


글. 김치년(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상명대 교수) 자료. 천연기념물과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