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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답사기] 내 고향의 재발견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1-08
조회수
3452
작성자 : 김성오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가작(7위) 수상작]

며칠 전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지난 겨울 이후 실로 넉 달만의 고향방문이다. 서울에서 여러 가지 일로 정신없이 살다가도,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이 떠오를 때면 못 견디게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내가 나고 자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가 않다 보니, 고향을 방문하는 것은 사실 마음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날에나 큰마음 먹고 겨우겨우 다녀올 정도이다.

이번에는 마침 다니는 직장에서 사흘 연휴가 주어져 봄나들이도 할 겸, 온 가족이 함께 고향을 다녀오기로 했다. 서울을 출발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현풍에 도착하니 거진 4시간이 걸렸다. 구마고속도로의 현풍나들목 부근에서 살고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예고도 없이 먼 길을 내려온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를 보시고서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고 놀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신다.

예전부터 고향을 방문할 때,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고향에 있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에 대해서 그 유래와 가치, 그리고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실 외지로 유학을 떠나기 전, 중학교 때까지의 유년 시절을 현풍에서 보냈다고는 하지만, 현풍이라는 고장이 다른 곳과 구별되는 어떠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전통들이 현재 어떠한 유형, 무형의 유산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고향에 있는 문화유산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지역의 유명한 문화재들이나 외국의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내가 살아온 터전과 그 속에서 형성된 나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 것은 얼마 전부터이다.

한 번의 답사로 고향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주위의 몇 가지 문화재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살펴보고 서울로 돌아오겠다는 각오를 하고 떠난 고향길이다. 이번에 살펴보기로 계획한 곳은 두 곳이다. 현풍곽씨십이정려각이 그 첫 번째이고, 도동서원이 그 두 번째이다.

솔례(率禮)의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 현풍에서 구지 방향으로 차를 몰고 10분 쯤 가다 보면 솔례라고 불리는 제법 큰 동네가 나온다. 행정상의 지명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동 또는 대리라고 불리는데, 예로부터 현풍(玄風) 곽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솔례(率禮)라는 말은 예(禮)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된 현풍곽씨 십이정려각은 이 마을의 초입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찾아 갔을 때, 문이 잠겨 있었지만, 관리하시는 분을 찾아뵙고 간곡히 부탁을 드려 어렵사리 안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조그만 문을 들어서자, 한 지붕 아래 12칸으로 나누어진 한 채의 건물이 보인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촌(率禮村)의 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신 정려각으로서, 이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조선 영조 때 한 곳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각 칸마다 정려를 받은 사람을 나타내는 현판과 행적을 그린 채색화가 놓여져 있다.

유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을 잘 지키면 상을 내려 이를 널리 알리고 다른 이들이 본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보통 한 마을에서 한 사람도 정려를 받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이곳 솔례에서는 12정려가 나왔으니 현풍곽씨 후손들이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마을의 초입에 정려각을 세워 조상들의 올바른 삶의 행적을 본받고 마을의 자랑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리라. 정려각에 모셔진 12분, 그들 모두가 다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사연의 주인공이지만, 그 중 임진왜란 때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지킨 사효자(四孝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다.

망우당 곽재우의 사촌동생인 곽재훈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결, 둘째는 청, 셋째는 형, 넷째는 호라고 하였다. 이 4형제가 임진왜란 때에 병든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기슭의 굴 속에서 피난을 하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부친을 해치려 하자, 4형제가 차례로 부친을 보호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부친만 살아남았다. 왜적은 그 효행에 크게 감동하여 석방하면서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다섯 글자를 쓴 패를 달아 다른 왜적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화려한 단청으로 꾸며진 정려각을 살펴 본 후, 밖으로 나와 정려각을 감싸고 있는 흙담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충과 효, 그리고 절개라는 만고불변의 도덕과 가치를 좇아 생명을 초개처럼 버린 옛 조상들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다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다시 한 번 돌아본 정려각에는 범상치 않은 소나무가 한 그루 담장 너머로 손을 내밀고 있다. 수령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상들의 훌륭한 기상을 이어 받아서인지, 잎이 짙푸르고, 가지가 뻗은 기품이 예사롭지 않아, 떠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다시 한 번 멈추게 한다.

낙동강가에 서린 선비들의 기상, 도동서원(道東書院) 십이정려각을 나와 대니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길을 따라 다음 행선지인 도동서원으로 향했다. 때가 봄의 절정인 5월인지라 길가의 논밭에는 초록빛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 눈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시퍼런 보리밭 위로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들의 날개짓이 무척 경쾌하게 느껴진다. 말미와 자모리를 지나자 가파란 산길이 나타났다. 기어를 1단으로 놓고 올라가자니, 차가 무척 힘들어한다. 잠시 후 시야가 탁 트인 고갯마루가 하나 나오는데, 고개 이름이 다람재라고 한다.

잠시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 보니,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푸른 물길과 함께, 강 건너편으로는 수박과 참외의 산지로 유명한 고령군 개진면의 벌판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인다. 여행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정자에 올라가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며, 고향의 강바람과 산바람을 음미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고갯길을 내려 가니, 얼마 안 가 왼쪽으로 도동서원이 보인다. 요근래에 정비를 하였는지 주차장과 관리 사무소의 시설들이 산뜻하다. 차를 세우고 관리 사무소에 답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관람을 요청하였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갑자사화 때 숙청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봉향한 유서 깊은 서원이다. 1865년에 있었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과 함께 우리 나라 5대 서원의 하나로 꼽힌다. 처음에는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으며 명칭도 쌍계서원(雙溪書院)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위치인 구지면 도동리에 다시 세워졌다.

서원 안으로 들어 서기 전, 먼저 수월루 앞에 서서 서원의 전체 모습을 한 번 살펴 보았다. 우선 평지가 아닌 완만한 산비탈에 서원을 세우다 보니, 건물들의 배치가 다소 조밀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서원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흙담과 서원의 입구에서부터 중앙통로를 기준으로 일렬로 배치된 주요한 건물들,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 나머지 건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의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서원의 정문격인 수월루(水月樓)에 올랐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돌로 된 좁은 계단을 지나 수월루에 올라서니, 눈앞으로 낙동강과 고령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물 위에 비친 달빛이라는 의미의 수월루는 선비들이 경치를 즐기고 시를 지으면서 휴식을 취한 누각이라 한다. 수월루를 지나 중앙으로 놓인 돌길과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환주문(喚主門)이라는 조그만 문이 나타나는데, 특이하게도 이 문 위에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 기와가 놓여 있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중문인 환주문을 지나 들어서면 강학공간이 나오는데 정면에 중정당(中正堂)이 서 있고, 양 옆에 있는 것이 유생들의 기숙사인 거인제(居仁齋)와 거의제(居義齋)이다. 중정당의 동쪽에는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서쪽으로는 제사 때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제향공간인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중 사당과 중정당, 그리고 서원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토담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옛 선비가 된 기분으로 팔자걸음을 걸으며 서원 안을 천천히 거닐어 보았다. 서로 조화를 이룬 서원내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각양각색의 돌을 다듬어 정성스레 쌓은 기단들, 그리고 돌과 기와를 이용하여 세련되게 기교를 부린 토담을 접하니, 이 속에서 학문과 사상을 논하였을 옛 지조 높은 선비들의 절도 있고, 고고한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관람을 마치고 서원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반갑게 나를 맞는다. 이 자리에 서원을 처음 세울 때 심은 나무라고 한다.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도동서원과 영락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가지가 축축 늘어져 지지대를 여러 개 받쳐 놓았다. 그 모습이 흰수염 성성한 노유학자를 닮아 나 스스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나의 근원을 찾다 도동서원을 나와 시골집으로 향하지 않고, 일부러 낙동강변을 따라 구지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옛 선인들의 얼과 자취가 담긴 두 문화재를 보면서 가진 벅찬 느낌과,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문화재 답사를 통해 나는 지금까지 무관심하게 지내왔던 고향의 문화유산에 대해 그 내력과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땅에서 살다 스러져간 옛 선인들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직접 느끼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 우리 고장에 전해지고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아름다운 전통과 미풍양속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유교적 가르침을 학문으로 연구하고,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였던 조상들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상들이 물려준 이 아름다운 전통들을 그리고 선인들의 혼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들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의 도리라는 생각도 새삼 다시 해 본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바라본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오늘따라 한결 정겹고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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