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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 년의 세월이 깃든 설화, 호방한 춤사위로 역사를 잇다
작성일
2012-08-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041



설화부터 궁중무용까지, 처용의 변화
처용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편紀異篇」2에 실린 것에서 출발한다. 신라시대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밤놀이를 하다가 늦게 귀가하여 아내를 범한 역신을 쫓아내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문간에 처용의 그림을 걸어놓으면 역신疫神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신라시대, 설화로 출발한 처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궁중무용으로 자리 잡아, 연말의 나례나 상층의 의례 때 추어졌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설화에서 출발하여 궁중무용으로까지 변화를 거듭한 처용. 처용의 진정한 매력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상과 철학이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있다.
“처용무는 단순히 춤만 주목할 게 아니라, 반주로 사용되는 음악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궁중음악 중에서도 가장 장엄한 음악이 모두 거기에 쓰여요. <수제천>과 <관악영산회상>의 <향당교주>, <상령산>, <세령산>, <도드리> 등이지요. 춤사위 또한 음악에 걸맞게 호방하면서도 장중하고 절도 있습니다. 내공을 절제하면서 추는 춤이에요. 힘이 깃든 정중동靜中動의 묘미를 아주 생생하게 살리고 있다고 할까요.”

처용무는 원래 혼자 추는 춤이었으나, 조선시대 세종 때 오방처용五方處容으로 바뀌어 다섯 명이 추게 되었다. 다섯 명이 오색(파란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의 옷을 입고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한 춤을 춘다.



강렬한 이끌림이 오늘의 처용무를 탄생시키다
“처용무와의 첫 만남은 지금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전신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입학 후 국립국악원에서 매주 토요일에 진행하는 상설 공연에 사회자로 데뷔하게 되었어요. 그 날, 춘앵전과 살풀이, 처용무 등이 무대에 올랐지요. 그때 처용무를 처음 본 거예요. 처용무의 춤사위가 굉장히 호방한 기운을 담고 절도 있고, 동작의 선이 굵직했어요. 남성적인 동작과 더불어 춤사위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린 춤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명 받아 처용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요.”

인남순 조교와 처용무는 1967년 인연을 맺게 되었다. 4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인남순 조교는 처용무의 세계화를 위해서 노력해왔다. 뉴욕 카네기홀 대극장, 링컨센터, 프랑스 유네스코 본부 오디토리움, 샹젤리제 대극장, 하버드 대학, 노스웨스턴 대학, 옥스포드 대학 등의 공연 등 150여 차례 해외공연을 해 왔다. 해외공연을 해 오면서 처용무가 세계인과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례도 많았다. 폴란드에는 세계무용전용극장이 있는데, 처용무 공연 때 무대연출자들이 춤을 보고 아시아 춤 중에서도 이렇게 다이나믹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춤이 있었느냐 하며 감탄했다. 또한 파리 유네스코 본부 공연 때는 CNN에서 처용무를 3일 동안이나 집중조명하여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이것은 처용무의 미래이자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인남순 조교는 그저 춤만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처용무가 더욱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도전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처용무를 궁중건강체조로 만든 것이다.

“전통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는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서 끊임없는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도 큰 힘이 됩니다. 그 일환으로 궁중건강체조를 만들었어요. 처용무는 생각보다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이 많아요. 처용무의 반주음악인 도드리장단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었고,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청소년들에게 강습을 하고 있지요.” 처용무의 대를 잇고 있는 인남순 조교의 활동은 조선왕조 의궤를 연구하여 궁중연회를 재현하는 것에 커다란 맥이 있다. 인남순 조교의 끊임없는 고문헌 연구는 처용무의 역사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20여 년 전쯤, 궁중연회를 모두 기록한 기록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부터 조선왕조 의궤에 기록된 궁중연회를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문헌을 연구하면서 알게 된 것이, 남자 역할이기 때문에 남자가 추는 춤인 줄 알았는데 과거에는 여자가 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보면서 의궤를 더욱 0203 40심도있게 연구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남순 조교의 이러한 노력은 전통과 현대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사유思惟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저 춤사위만 답습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 인남순 조교가 행한 조선왕조 의궤 연구가 있었기에 묻혀 있던 처용무의 위상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행해진 궁중연회를 지금 볼 수 있는 것이다.

궁중무용의 대중화, 처용무의 미래를 보다
인남순 조교의 이력은 화려하다. 처용무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궁중무용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 중 하나는, 사극 제작 시 전통 춤 안무와 감독을 담당하며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궁중정재를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참여한 드라마는 <춤추는 가얏고>, <용의 눈물>, <왕건>, <왕과 비>, <장희빈>, <명성황후>, <황진이> 등 다수다.

궁중무용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인남순 조교의 노력 아래, 우리는 처용무의 빛나는 미래를 본다. 전통 궁중정제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우리 춤을 젊은 사람들이 접한다면 처용무의 미래 또한 밝기 때문이다.

“10여 년 동안 재현해온 조선왕조 의궤 연구를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외국어로도 번역해서 어느 나라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어요. 또 처용무를 체조로 만들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오락게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콘텐츠를 만들어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문화를 형성하고자 해요. 그렇다면 처용무는 학술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깊이 있는 춤사위로 거듭나리라 믿습니다.”






글·박세란 사진·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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