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자주외교의 산실,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가다
작성일
2012-10-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17



102년 만에 되찾은 대한제국 공사관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한복판에 과거 일제에 빼앗긴 옛 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이 존재 한다”는 사실이 국내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2년 무렵이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매체들이 앞다퉈 관련 기사들을 쏟아냈고, 일부 언론이 이 같은 사실을 함께 발굴해 소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옛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에 얽힌 세밀한 역사는 물론, 구체적인 실체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던 때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목원대 김정동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전문가들로부터 역사적 가치 등이 새롭게 발굴되고, 조명되면서 매입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지난 2003년,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아 현지 교민사회를 중심으로 공사관 매입에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이후 2010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현지 교민사회는 물론, 정부부처까지 매입에 나서지만 모두 뜻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던 2012년 8월 17일,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마침내 매입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는 민관협력을 통한 매입추진전략에 따른 성과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단돈 5달러에 일제에 강제 매각된 이래 102년 만의 일이었다. 원래 이 건물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테네시강의 헨리 요새를 탈환하는데 탁월한 공적을 남긴 세스 리야드 펠프스Seth Ledyard Phelps가 전역 후 살아갈 목적으로 1877년 건립하였다.

그러던 중 1891년 당시로선 거금인 2만 5천 달러에 펠프스의 사위인 세벨론 A. 브라운sevellon A. Brown으로부터 고종임금 명의로 매입을 하게 된다. 지상 3층, 지하 1층 빅토리안 양식의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의 연면적은 542.55㎡(약 164평), 우리로서는 제법 규모와 격식을 갖춘 최초의 단독건물을 사들인 셈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우여곡절 끝에 몇 차례 소유자가 바뀌었지만 당시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특히 지난 8월 말 현지에 급파된 문화재청 조사단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건물의 외부는 1층 현관 진입로에 설치되었던 포치porch 부분만 제거되었을 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내부공간 역시 샹들리에나 가구 등을 제외하곤 특별한 구조변경 없이 당시의 원형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도 거듭 확인되었다. 아울러 현지조사에 이은 문헌조사를 통해 건물의 용도와 쓰임새도 보다 상세히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즉 건물 1층은 당시 접견실과 집무실, 그리고 본국의 국왕께 망궐례를 올리던 정당正堂 등으로, 2층은 침실 등 개인공간으로, 3층은 벽이나 칸막이 없이 넓게 트여 각종 모임과 연회 등을 개최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개조되어 쓰였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확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1900년대 초 공사관 내부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흑백사진 2장에 대한 의문도 함께 풀 수 있었다. 현장 대조결과 1층 접견실과 집무실 입구를 동일한 장소에서 각각 번갈아 촬영한 사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사진 판독결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던 여러 정보들도 현장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창문과 창문을 감싸고 있는 덧창장식, 문 프레임과 천정의 몰딩 등 세부적인 부분들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음을 사진과 대조해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현지조사를 마친 전문가들은 “지금의 보존상태가 원형복원작업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내다봤다.




자주외교의 현장, ‘영욕의 역사’도 고스란히

그럼 고종이 이처럼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 규모와 격식을 갖춘 독립건물을 막대한 자금을 주고 매입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당시의 한반도 정세와 관련이 깊다.

오랫동안 조선을 억압해오던 청나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신흥 근대국가로 급성장하며 조선을 새롭게 위협하던 일본과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한반도에서 기회를 엿보던 러시아 등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한복판에 단독건물 형태로 공사관을 개설한 뜻은 미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발전시킴으로써, 한반도를 옥죄던 열강구도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자주적 외교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로 풀이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근대사를 함께 품은 공간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으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동북아정세는 태평양 건너 공사관 건물의 운명 또한 바꾸어 놓고 만다. 청일전쟁(1894~1895)의 승리와 함께 한반도 장악에 성큼 다가선 일제는 또다시 을미사변(1895)을 통해 친러파 제거에 나섬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피할 수 없는 일전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의 패권을 완전히 거머쥔 일제는 식민지화 수순에 따라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만다. 따라서 이때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관리권도 일본공사관에 함께 넘어가게 되고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의 결과로 공사관의 소유권마저도 일제에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매우 굴욕적일 뿐 아니라, 치밀하기가 이를 데 없다.

지난달 말 문화재청 조사단 일행이 워싱턴 외곽의 한 문서보관소에서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1891년 고종이 2만 5천 달러의 거금을 들여 매입한 공사관이 한일강제병합을 불과 두 달 앞둔 1910년 6월 말 단돈 5달러에 일제에 강제 매각되고,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1일자로 등기가 신속히 완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시각 단 1분의 시차를 두고 공사관은 단돈 10달러에 일제로부터 미국인에게 지체 없이 재매각 되었음을 거듭 확인하였다. 매각에 담긴 의미는 그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대한제국으로부터 단돈 5달러에 공사관을 사들였다면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합법적인 거래관계가 성립되었음을 뜻한다. 때문에 이는 훗날 우리가 국권을 되찾더라도 서류상 합법적으로 거래된 공사관 건물을 되돌려 받기는 어렵다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해본다.



고종은 워싱턴 주미공사관 설치(1891)를 계기로 이를 거점으로 워싱턴 조야에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이를 통해 미국을 통로 삼아 근대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러일전쟁을 전후로 일본에 경도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가쓰라-테프트밀약(1905)과 포츠머스 조약(1905) 등 지속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고종은 크게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이미 정해진 약소국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옛 주미공사관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주변국의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미국과의 자주적 외교관계를 통해 새로운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고종의 비원이 어린 공간이란 점을 부정할 순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 옛 대한제국공사관이 ‘잃어버린 102년 세월’을 건너 당시 모습 그대로 우리 품에 돌아왔다. 이곳은 한국과 미국의 근대사를 함께 품은 공간이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를 뛰어 넘어 ‘더 큰 세계’를 향한 창구였다. 이제 우리의 한숨과 눈물이 깃든 공간에서, 세계를 향한 대한민국의 꿈을 새롭게 펼치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때다. 옛 대한제국공사관의 귀환이 바로 그 출발점인 것이다.



글·사진·강임산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국장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