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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줄 위에서 펼쳐지는 광대의 삶
작성일
2016-11-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81

줄 위에서 펼쳐지는 광대의 삶 흔히 “줄을 잘 타야 잘 산다”는 말은, 세도가에 제대로 빌붙어야 출세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여기서 줄은 인연의 끈 같은 것이다. 실세 정치인에게 붙어서 좋은 자리에 취직하는 경우도 있고, 부자에게 잘보여 그럴법한 회사에 취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튼튼한 줄인 줄 알고 탔는데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어서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그 ‘줄을 잘 타는 것’에 달려있다. ‘줄을 탄다’는 표현은 사실 우리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전통놀이인 광대의 줄타기에서 나온 것이다. ©연합콘텐츠

민속 연희 ‘줄타기’의 역사

광대는 줄 위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연희를 펼친다. 그냥 땅바닥을 걸어갈 때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수가 많은데, 광대는 허공 위에 매달아 놓은 가느다란 줄을 탄다. 줄 위에서 온갖 재주를 보이고 노래도 부르는 통에, 줄타기는 확실히 매혹적인 구경거리임이 틀림없다.

줄타기는 고구려나 신라시대로까지 소급할 수 있는 민속 연희다. 조선시대에 들어 줄타기는 ‘광대 줄타기’와 ‘어름 줄타기’ 두 계통으로 발달한다. 광대 줄타기는 나라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된 광대들이 하는 정재(呈才)의 하나이다. 『성호사설』에 의하면, 광대 줄타기의 솜씨가 아주 절묘하여 청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봉사도>라는 그림에는 청나라 사신들 앞에서 광대들이 줄을 타는 장면이 멋지게 그려져 있다. 줄광대들은 외국 사신이 왔을 때나 명절에 궁궐로 불려가서 놀이를 했으며, 양반이나 부잣집의 각종 잔치에서 보수를 받고 줄타기를 했다.

이처럼 광대 줄타기는 주로 지배층을 위한 놀이로 발달했다. 이에 반해 어름 줄타기는 ‘남사당패 어름 놀이’라고도 하는데,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민간을 대상으로 예능을 팔았던 남사당패의 여섯 가지 놀이 중 하나이다. 줄타기는 조선시대에 왕성하게 전승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전통적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으며, 이후 1976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줄타기의 체계적 계승에 힘쓰고 있다.

 

연희적 특성을 갖춘 우리의 줄타기

줄타기는 흔히 ‘판줄’이라고도 한다. 판줄은 줄광대라고 부르는 줄타기 연희자가 공중에 매단 줄 위에서 기예를 펼치는 것을 일컫는다. 줄광대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반주에 맞추어 재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가며 여러 형태의 잔 노름을 선보이면서 판을 이끌어가는 공연예술이다. 서커스의 줄타기는 줄 위에서 곡예만을 보여주지만, 우리 전통 줄타기는 어릿광대와 대화를 나누는 연극적 요소에 재주와 기예를 더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다양한 줄타기 연행 가운데 유일하게 연희적 특성이 강한 공연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줄광대는 어릿광대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관객과도 직접 대화를 나누며 관객이 요구하는 잔 노름을 덤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관객과 공연자가 쌍방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갖춘 탁월한 현대적 연희라고 볼수 있다.

 

수많은 전승자가 이어온 줄타기의 명맥

전설적인 줄타기의 명인으로 우리는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말의 줄타기 명인으로 임금 앞에서 줄을 탔는데 하도 잘타서 상상봉(上上峯)이라는 의미를 담아 ‘김상봉’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이가 있다. 그의 제자인 최상천 명인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윗대의 줄타기 명인이다. 이들 줄광대의 줄을 이어받아 20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명인으로는 김관보와 이봉운 명인이 있다. 판소리 명창 강도근의 부친도 줄타기의 명인이었다고 전해온다.

02 삼현육각의 반주 ©문화재청 03 재담을 주고받는 모습 ©문화재청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 상황에서도 줄타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김관보 명인의 제자인 김봉업·임상문·이정업·오돌끈·이동안·김영철 등의 활약이 계속됐다. 해방 후 다른 전통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줄타기의 명맥도 거의 끊어지는 위기에 처했었다. 현재 줄광대의 전통은 김영철의 제자인 김대균에게, 남사당패의 어름 줄은 조송자와 권원태에게 전승되고 있다.

줄타기 연희는 즉흥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엄격한 연희 대본에 의해 연행된다. 줄타기 연희본은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인 심우성이 정리한 김봉업 채록본과 김영철 채록본이 있다. 김대균은 스승인 김영철과 이동안에게 배운 내용을 종합하여 새로이 자신의 연희본을 구축해, 한 시간 남짓한 판줄을 연희하고 있다.

줄타기 명인 김대균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6년 아홉 살 때, 민속촌에서 줄을 타고 있던 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줄타기를 배웠다. 당시 문동룡 등 세 사람이 함께 배웠으나 두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게 됐고 김대균 혼자 줄타기를 이수했다. 1979년 덕수궁에서 줄타기 공연을 마친 김영철이 뇌내출혈로 쓰러지게 되면서 실기로 전승되던 길이 막히게 되었다. 김대균은 김영철 명인을 집에 모시고 구전심수(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로 줄타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김영철 명인이 말로 설명하면 김대균은 줄 위에 올라가 부친의 보조를 받으면서 잔 노름의 구성을 익혀나갔다. 석 달이면 잔 노름 서너 가지는 배울 수 있었다. 현재 김대균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보유자로 지정되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김대균은 이동안 명인으로부터 판줄 아니리를 6년간 공부하며 줄타기의 연극적 특성을 확장했다. 그래서 김대균의 무대는 줄타기 재주는 물론, 어릿광대와 나누는 재치 있는 재담을 통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김대균은 성우향 명창에게 판소리를 전수받아, 줄 위에서의 다재다능한 기량을 펼쳐나가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흥

줄타기의 기예는 ‘잔노릇·잔재비’라고도 부른다. 김대균이 줄 위에서 벌이는 기예는 40여 종에 이른다. 그중 몇 가지 기량을 살펴보자. ‘외홍잡이’는 허튼타령 장단으로 줄 위에 올라선 다음, 왼발로 줄을 딛고 무릎을 굽히면서 오른발을 줄 밑으로 내렸다가 튀어 일어서고를 반복하면서 걷는 기예이다. ‘코차기’는 줄광대가 줄에서 섰다가 허튼타령 장단에 맞춰 외홍잡이를 한 다음, 튀어 솟구쳐 일어나 오른 다리를 앞으로 번쩍 들어 코를 차는 흉내를 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더 어렵고 복잡한 동작이 이어지면서 아름다움은 극에 달한다. 마치 땅 위를 걷는 듯 줄 위를 누비며 춤을 추고 노래하던 김대균이 중간쯤 갑자기 떨어질 때 관객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이것이 관객을 사로잡는 그만의 익살스러운 전략이다.

김대균이 줄 위에서 보여주는 기예 가운데 양반걸음 흉내는 풍자적 요소가 아주 강하다. 노론(老論)의 걸음걸이와 소론(少論)의 걸음걸이를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이는 양반층에 대한 야유를 묘사한 것이라 더욱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의 뾰족구두 신은 아주머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장면은 삽시간에 객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굳은 심지를 갖고 이어온 줄타기의 기예를 보는 행복과 함께, 우리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줄타기의 매력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공연예술이라 할 수 있다.

04 김대균 제58호 줄타기 보유자 ©문화재청 노론(老論)의 걸음걸이와 소론(少論)의 걸음걸이를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이는 양반층에 대한 야유를 묘사한 것이라 더욱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의 뾰족 구두 신은 아주머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장면은 삽시간에 객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글‧유영대(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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