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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산의 학문 업적이 탄생한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
작성일
2022-05-3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08

다산의 학문 업적이 탄생한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자 최고의 실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은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긴 시간 이어진 귀양살이는 그에게 좌절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학문에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정약용은 이곳에서 쓴 50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했다. 00.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초당

1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보낸 전라남도 강진

1762년 지금의 경기 남양주에서 태어난 정약용은 20대 초반까지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 1776년 성호사설을 지은 실학자 이익의 학문을 접하며 실학에 눈을 뜬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1783년부터 1801년까 지실학을 공부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정약용을 아끼고 사랑 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23대 순조가 즉위한 가운데 순조 1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서학(西學)에 관련된 백서(帛書)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지자 정약용 역시 서학에 입문한 이유로 모함을 받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은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유배 생활 18년 중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그의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이 탄생한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고, 저술뿐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며 실학의 후학을 양성했다.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이곳은 노후로 붕괴한 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의 주선으로 1958 년 복원한 것이다. 유적 인근에는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다산박물관도 자리해 있다. 정약용의 영정을 비롯해 다산연보, 가계도, 유물 등 전시물을 살펴볼 수 있다.


전원생활을 사랑했던 다산의 흔적들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은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본채와 서암, 동암 등 세 개 건물로 이뤄져 있다. 서암은 제자들이 묵는 숙소였고 동암은 정약용이 저술에 필요한 2,000여 권의 책을 갖추고 머무르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다산학단’으로 불리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 여 권의 저서도 이곳에서 완성됐다. 유배 생활 동안 정약용은 저술 활동뿐 아니라 자연 친화적인 전원생활도 즐긴 것으로 알려진다. 직접 밭을 일궈 먹거리를 얻었고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키우기도 했으며 약수터인 약천(藥泉)의 맑은 물로 차를 즐겼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직접 깎은 ‘丁石(정석) 바위’를 찾아볼 수 있다. 가족이 그리울 때면 동암 옆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천일각’이라 이름 붙였다.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을 벗어나 1km 이어지는 오솔길을 지나면 백련사가 나온다.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에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스님을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짓기를 즐겼다. 이처럼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에서는 공부하길 즐기고 자연과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의 유배 생활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은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유배 생활 18년 중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그의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이 탄생한 곳이다.




정리. 편집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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