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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설립 50주년 맞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작성일
2019-11-2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03

 

2019년 11월 5일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창립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니까 1969년 11월 5일 처음 서울의 경복궁관리소에서 문화재관리국 소속의 문화재연구실로 출발하였다. 그해 12월 7일 개설식이 열렸다. 발족 당시 문화재 연구실은 미술공예연구실·예능민속연구실·보존과학연구실 등 3개 기능을 수행하였다. 01. 경주연구소 월성현장 언론 공개 02.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전경

1973년 3월 9일 문화재연구실이 문화재연구담당관실로 이름을 바꾸었고, 2년 후인 1975년 4월 17일 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초대 문화재연구소장은 당시 학예연구관인 김정기 박사이다. 문화재연구소로의 개칭과 함께 부여받은 임무는 첫째 전통문화의 계승을 위한 문화재의 학술적 연구, 둘째 역사적 고증에 필요한 기본적 자료수집, 셋째 문화재의 과학적 보존기술의 연구개발 및 관리방법의 조사연구이다.


1988년 9월 1일 유적조사연구실이 신설되어 4개 연구실로 확대되었고, 1990년 1월 3일 경주문화재연구소·부여문화재연구소·창원문화재연구소·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가 신설되면서 이후 지방문화재연구소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기관명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5년 11월 22일부터 사용하였다.


지방연구소가 설치되면서 백제·신라·가야문화권 지역 내 문화재보존을 위한 조사연구라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이후에도 연구소의 기능과 조직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서무과(1994년), 건조물연구실(2003년), 복원기술연구실·나주문화재연구소(2005년), 자연문화재연구실(2006년), 중원문화재연구소·연구기획과(2007년), 문화재보존과학센터(2009년), 안전방재연구실·강화문화재연구소(2017년), 완주문화재연구소(2019년)가 설치되었다. 그 사이에 부서의 명칭이 부분적으로 바뀌었고, 예능민속연구실은 조직개편으로 국립무형유산으로 부서이관되었다. 그리고 연구소는 2004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대전 대덕연구단지로 청사를 이전하였으며, 2007년에는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는 변화도 있었다.


설립 당시 1개 연구실로 출발하여 반세기를 지나 현재 2과 7실 7지방 연구소 1센터 총 17개 부서가 되었으니 17배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원은 1969년 10명으로 출발하여 2019년 199명으로 19.9배 양적으로 증가하였고, 1975년 5200만 원의 예산이 2019년에 490억 원으로 대략 942배 양적으로 확대 성장하였다.


양적 성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주 황룡사지와 익산 미륵사지 같은 대규모 발굴조사는 물론 천마총, 황남대총, 정림사지, 왕궁리 유적 등 크고 작은 발굴조사의 성과도 연구소가 걸어온 지난 50년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여 원형에 충실한 고증 복원을 이루었고, 남북교류 협력 사업으로 만월대 발굴조사 등은 민간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성과이다.


연구소 출발부터 함께한 보존과학은 초창기 문화재 보존처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모지였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오늘날 보존처리의 일반화와 대중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문화재보존과학센터의 설립은 보존처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경주·부여·가야·나주·중원·강화·완주 등 7개 지방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전국의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 출발과 함께 민속분야 조사연구에서 핵심 역할을 해온 예능민속연구실은 조직개편에 의해 현재 국립무형유산원으로 이관되었지만 전국민속종합조사라는 최대 성과를 이룬 것도 연구소의 역사 속에 있다.


1970년대 발견된 신안해저유물의 발굴과 침몰선의 인양 복원은 해양문화재 조사연구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우리나라 전 지역의 문화유적을 조사 기록한 문화유적총람 발간은 오늘날 문화재 데이터베이스의 출발이자 문화재관리의 기초를 이루는 성과이다.


미술문화재연구실 역시 연구소 출발과 함께하면서 광복 이후 축적된 한국 미술사의 성과를 담은 한국서화가인명사전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고고연구실의 한국고고학사전 발간과 북한, 연해주, 몽골 등 국외발굴조사 역시 이루기 어려운 성과로 꼽을 수 있다.


비교적 늦게 설치된 자연문화재연구실은 천연기념물과 명승에 관한 발굴조사는 물론 기후변화와 재해 등 환경변화에 대비한 보존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등 정책연구와 지원에 기여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센터는 자연유산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2017년 신설된 안전방재연구실은 최근 발생 빈도가 많아지고 있는 지진과 자연재해로부터 문화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이 분야 역할과 성과를 기대해본다. 모두 열거할 수 없는 점 양해 바란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사람의 나이 50세를 일컫는 지천명(知天命)이란 말이 있다. 공자가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구소는 그동안 걸어온 길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냉정히 뒤돌아보고 다가올 반세기를 설계하는 세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문화재 분야 원로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문화재조사연구 50년 성과와 미래전망 연구”(2018년)에서 다음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연구주제 확대, 둘째 연구소 기능 및 조직 강화, 셋째 지방연구소의 기능 확대, 넷째 인적 역량 강화이다.


문화유산을 대하는 인식이 변화하고 있고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야 하는 숙제가 앞에 놓여 있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이는 일, 첨단기술을 적용한 문화재 방재, 문화유산과 4차 산업혁명의 연결을 위한 연구개발 등 연구소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연구소는 50주년을 계기로 지난 반세기를 회고하면서 미래의 수요와 변화 발전에 대비한 중장기 연구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문화재 학술조사연구의 책임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글. 김삼기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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