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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와 사람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 친화적인 사냥, 매사냥
작성일
2012-05-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671

매사냥의 역사

매사냥의 기원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선사시대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매사냥이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약 4~5,000년 전 중앙아시아의 평원에 살았던 유목민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 후 이란, 이라크 및 인도 등을 거쳐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과 상인들에 의해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 퍼져나갔다. 유럽의 매사냥은 잉글랜드의 색슨왕조시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중세 말기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귀족들 가문에 필수적인 기예로 인식되고 고급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으로부터 매사냥 문화가 미국으로 전해지면서 매사냥 기술을 다룬 전문서적들이 간행되고 매사냥을 다룬 잡지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통해  북미의 매사냥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및 당나라 시대가 매사냥의 전성기였으며 그 당시 몽고나 원나라는 매사냥을 국기國技로 정하였고 수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매사냥을 했으며 요遼의 천조제(天祚帝, 중국 요 왕조 최후의 황제)는 매사냥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귀화한 백제인들이 매사냥을 전승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나며 ‘일본산해명산도회 2권’에는 백제사람 주군이 일본에 매사냥을 전해 준 기록이 나타난다.

한반도에서의 매사냥

우리 민족도 고대로부터 비교적 최근(해방이전)까지 역대 임금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 까지 약 2,000여 년 동안 매사냥을 즐겨왔다. 고조선시대에 만주 동북지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으로부터 동북아시아로 전승되어 중국, 한국 및 일본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본격적인 스포츠로 즐긴 것은 원나라가 고려를 통치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매사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조선 영조 50년(1774년) 안정복이 저술한 책으로 단군조선부터 고려 공양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에 나타난다. 매사냥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족 및 귀족층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고려의 충렬왕 때는 매의 사육 및 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을 설치했으며 응방은 조선 숙종 때까지 이어졌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에도 매사냥이 성행하였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매사냥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며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매사냥에 관련된 많은 기록이 있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임금이 매사냥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아, 충신인 대보협보가 매사냥을 줄이고 민생 돌보기를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17세기 후반에 화약을 이용한 총기와 자동차 그리고 도로가 발달되면서 매사냥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 관련 지명과 전통 사냥매의 종류

우리 조상은 머리 셋 달린 매三頭鷹의 그림을 만들어 몸에 지니거나 문간에 붙이면 가정의 모든 건강과 재물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준다고 믿었다. 지역 이름도 매에 관련된 이름이 많이 있다. 충청도, 경기도, 전라도 등 지역에는 지금도 매바위, 매봉, 매봉재, 매봉산, 맷골 등 매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민요가사에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등 여러 가지 매 이름이 등장한다. ‘보라매’는 1년생 어린 개체로 참매 중 가장 용감하며 사냥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진이’는 산에서 성장한 참매를 포획하여 길들인 것을 말하며 ‘수진이’는 새끼 참매를 길들인 것을 말한다.  매 중에서는 ‘백송골’이 성질이 굳세고 날쌔어 해동청 가운데 아주 귀하게 여기는 사냥매다. 이외에도 새매의 수컷인 ‘난추니’는 깃이 예리하여 새를 후려쳐서 잘 잡고, 암컷인 ‘익더귀’는 독수리를 닮아 조금 과장을 해서 능히 호랑이를 잡는다고 표현했다. 매사냥은 매를 사랑하고 매와 충분히 교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 사냥법이다.

매 길들이기 및 매사냥

요즘에는 축구, 야구, 농구 등 계절에 따른 스포츠 축제가 벌어지지만 특별한 스포츠가 발달치 못했던 시절에 우리 조상은 무엇을 했을까? 가을철 추수가 끝나 농한기인 한로나 동지가 되면 우리 조상은 번식을 마치고 남하하는 참매를 받아(잡아) 매사냥에 이용하였다. 야생의 매를 길들이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사납고 자존심이 강한 매를 길들여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을 다하고 꾸준히 노력을 하여 매와 주인과의 신뢰가 쌓일 때 가능한 일이다. 약 50~60여 일 거쳐 사람과 친해지기(매풀기), 기운조절(살맞추기), 뜀밥훈련(손밥먹이기), 날뜀밥훈련, 줄밥훈련 그리고 날밥훈련 등을 거쳐 매사냥에 도전하게 된다. 매사냥은 매를 다루는 사람(봉받이), 사냥감을 몰아주는 사람(떨이꾼) 그리고 망을 보는 사람(배꾼) 등 약 10여 명과 매가 삼위일체가 돼서 야생의 토끼나 꿩을 잡는 겨울철 최고의 종합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매사냥을 통해서 우리 조상은 이웃 마을사람들과 화합을 다졌고 매의 용맹성을 통해 대자연 속에서 건강과 호연지기를 길렀다.
한편 초가을과 겨울동안 매사냥에 이용했던 매는 봄이 되면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총기를 사용하는 오늘날의 사냥에 비해 이 얼마나 친환경적인 사냥인가? 일찍부터 우리 선조는 조류의 종 다양성 보존을 고려한 자연 친화적인 환경보존활동을 한 셈이다.

매(사냥)에 관련된 속담과 말

‘꿩 잡는 게 매’란 말이 있다. 매는 꿩 잡는 데는 명수다. 따라서 방법이야 어떻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고란 의미로 쓰인다. 여러 마리의 꿩이 동시에 날아 가면 매는 머뭇거리다가 모두 놓친다. 즉, 기회가 너무 좋으면 그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의미로 ‘떼 꿩에 매 눈’이란 말을 쓴다. ‘꿩 놓친 매’ 란 말은 애써 잡은 꿩을 놓쳐서 헐떡이며 분함을 빗대는 말이다. ‘꿩 대신 닭’이란 말은 사냥을 나간 매가 꿩은 못 잡고 닭을 잡았다는 의미로 최선이 아닌 차선도 상책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시치미 뗀다’라는 말은 사냥 중 잃어버린 매를 다른 사람이 잡아 주인 이름이 새겨진 명패(시치미)를 떼어내고 자기의 매처럼 행세하는 행위를 말한다. ‘옹고집(甕고집)’이란 단어는 억지가 몹시 심한 고집이란 뜻이다. 야성이 강한 매는 고집이 세어 길들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즉 응고집鷹固執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슷한 말로 ‘골났다’란 말은 사람이 심하게 화가 나서 토라진 상태를 말하는데 골이란 참매의 한자로 참매는 한 번 화가 나면 여간해서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 습성에서 유래된 말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동서고금을 통해 그렇게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매사냥 문화가 오늘날 고도의 산업사회를 맞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총기의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야외에서 힘들게 매를 포획하고 훈련시켜 사냥하는 매사냥 문화가 점차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매사냥 문화는 현재 대전시 매사냥 무형문화재 제8호인 박용순 보유자와 기타 진안, 울산 등지에 있는 몇 명에 의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던 차에 2010년 말 한국을 포함하여 아랍에미리트(UAE), 벨기에, 체코, 프랑스, 모로코, 카타르,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몽골 등 11개국의 매사냥 문화가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번 공동등재는 11개국이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냄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모범사례로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전통 매사냥 문화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글·사진·조삼래 공주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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