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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종의 한이 서린 육지 속의 고도 명승 제 50호 영월 청령포
작성일
2012-05-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09

단종의 이야기

어린 단종의 한과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피맺힌 절규다. 단종은 어린 시절 자기를 업어주던 할아버지 세종의 인자한 모습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요절한 아버지 문종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낳고 3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왕위 회복을 위해 충정을 다한 사육신의 죽음, 그리고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비통한 모습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어린 나이에 육지속의 고도,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은 한없는 슬픔에 잠겼다.

청령포는 영월의 서강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육육봉이 험준한 층암절벽으로 솟아 있고, 그 주위로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내륙의 깊은 산속에 있는 이 유형流刑의 땅은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이 바로 1457년(세조 3)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청령포다.

청령포는 서강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요새와 같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말굽처럼 휘돌아 나가는 서강의 물줄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산을 깎아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강물로 감싸인 아주 특이한 지형을 만들었다. 슬픈 역사를 지닌 서강변의 청령포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나루에서 바라보면 푸른 강물로 둘러싸인 청령포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 건너에는 깨끗한 강자갈과 흰 모래밭이 강굽이를 따라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가로로 길게 조성되어 푸르른 빛을 발하고 있으며, 소나무 숲 뒤로는 험준한 지세의 육육봉이 기암괴석으로 배경을 이루고 있어 청령포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비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를 품은 관음송 한 그루

청령포는 특히 소나무 숲이 매우 아름답다. 창송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은 밖에서 보는 모습도 빼어나지만, 하늘을 빼곡히 뒤덮고 있는 숲 안의 풍광도 매우 청량하다. 청령포의 소나무 숲 안에는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觀音松이 위치하고 있다. 관음송은 아주 오랜 풍상을 겪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자라 육중한 몸을 굳게 버티고 서있다. 이 소나무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슬픔과 울분으로 가득 찬 단종의 오열音을 들었다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관음송의 크기는 높이가 30m에 달하는 노거수로 중간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란 형태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수령을 80년으로 추정하여 계산된 것이라 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어가, 단묘유지비, 노산대, 망향탑, 금표비 등 단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단종어가는 소나무 숲과 연접하여 건립되어 있다. 2004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단종어가에는 단종의 모습이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고, 마당에는 1673년(영조 39)에 영조 임금의 친필을 각자하여 세운 단묘유지비가 서있다. 높이 162cm의 크기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는데, 비석의 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이 새겨 있다. 이 비석은 단종이 청령포에 살았음을 증명해 주는 비석이다.

청령포 서측의 능선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위치하고 있다. 층암절벽 위에 자리한 노산대에서 단종은 깊은 시름에 잠기었으며, 한양에 두고 온 왕비를 간절히 생각하며 흩어져 있는 돌을 쌓아 망향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는 금표비가 서 있는데 이 비는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으로서는 청령포의 동서방향으로 삼백 척, 남북으로는 사백구십 척 안에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퇴적된 흙을 파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령포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 길과 사형 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서 있다. 왕방연은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로서 어쩔 수 없이 단종에게 내려진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없는 아픔으로 가득했다. 왕방연의 심정을 담은 그의 시는 비석에 이렇게 남아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千里遠遠道 美人別離秋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此心未所着 下馬臨川流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川流亦如我 鳴咽去不休

1457년 유배지 청령포에서 머물렀던 단종은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잠기는 바람에 두어 달 만에 영월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는데, 10월에 단종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숨지게 된다. 권력은 정말 비정한 것이다. 자신의 탐욕에 의해 혈연을 무참히 죽여야만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싶다.

청령포의 역사는 휘돌아 흐르는 강물 따라

영월은 단종과 관련된 역사의 땅이다. 단종의 능인 장릉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본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이내의 장소를 선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조선왕릉 중에서 단종의 능만이 유독 한양에서 이렇게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단종은 죽임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졌는데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몰래 수습하여 산자락에 암장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는데 100여 년이 지난 중종 시대에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하였고, 250여 년이 지난 숙종 조에 와서야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되었으며, 이때에 그의 무덤도 장릉이란 능호를 갖게 된 것이다.

단종의 슬픈 역사로 점철된 청령포는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청령포의 하천지형은 감입곡류嵌入曲流라 한다. S자, 혹은 C자형으로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물돌이를 의미하는 용어인데, 청령포의 하천지형은 감입곡류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감입곡류의 하천이 더 큰 모양으로 형성되어 흐르다가 중간 부분이 터져 물돌이는 짧게 휘돌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청령포 하천의 모습이다. 옛날의 하도였던 곳은 그 후로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하천지형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도의 모습만 남아 있는 지형을 구하도라 한다. 청령포 앞에 남아 있는 구하도는 중요한 지리학적 의미를 갖는 지형이다.

청령포는 물돌이, 소나무 숲, 관음송, 육육봉의 기암절벽 등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은 물론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장소다. 이러한 장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청령포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50호로 지정했다. 청령포가 명승으로 지정된 후 이곳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영월군에는 청령포 외에도 선돌, 한반도지형 등이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명승들은 볼거리로 연결되어 활용의 상승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영월을 찾는 탐방객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숨어 있는 명소를 발굴하여 명승으로 지정하는 것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것이며, 또한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소중한 자연유산을 확보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글·사진·김학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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