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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포항중성리신라비, 신라 역사의 장을 넓히다
작성일
2010-02-1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39





인류 최고의 발명품, 그것은 문자?

인류가 발명한 것 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문자(글자)’를 그 으뜸으로 하고싶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고, 오늘의 문명단계로 이르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직립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져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인류의 생활 방식은 더 한층 높은 단계로 옮아 갈 수 있었다. 불을 이용하여 토기를 굽고 금속을 녹여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 것을 보면 불 역시 인류의 발명품 중 으뜸으로 삼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문자’를 그 위의 자리에 앉히고 싶다. 언어와 함께 문자는 우리 인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만약 언어와 문자가 없이 인류가 오늘날까지 진화해 왔다면 지금과 같은 과학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문자를 통해 인류는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 그리고 생각을 후세에게 전할 수 있었다. 구전口傳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자를 ‘어디에 적어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쓰이는 재료인 종이가 발명된 것은 중국 후한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 종이는 발명 이후 한참동안 귀중한 물품이었으니 구하기도 사용하기도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돌이나 나무 등에 눈을 돌리게 되었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무에 글을 새기게 되어 목간(혹은 대나무에 새긴 경우에 특별히 죽간이라고 한다)이 나오게 되었고, 돌에 새겨진 비석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토기의 표면이나 벽돌에 새기기도 하고 금속에 새기기도 하였지만, 그리 일반적이거나 손쉬운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종이 이외의 돌이나 금속 등에 새겨져 전해오는 유물을 우리는 금석문金石文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문자 생활의 초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생겨난 이후, 흔히 고조선이나 삼국을 초기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초기 무렵의 문자 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이들이 남겨 놓은 금석문 자료도 거의 없다. 간혹 발견되는 것은 중국인이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남겨 놓은 것으로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는지는 정확치 않다. 비록 문자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회에서 일정정도의 식자층이 형성되어 진정한 문자의 기능이 - 문자를 통한 서로의 의사 전달, 즉 쓰고 해독하는 능력이 가능 - 유지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더욱 알 길이 없다. 중국 동북지방 집안시에 우뚝 솟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런 의미에서 금석학적 의미와 위상이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이 비가 세워진 414년 고구려에서 문자라는 것은 보편적 가치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나 신라의 경우, 사정은 더욱 불명확하다. 이미 중국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을 통해 볼 때 그들도 문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하였을 것은 추측이 가능하다. 이처럼 삼국시대 초기에는 비록 문자생활에 대한 가능성은 짐작이 되지만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금석문 자료는 아주 빈약한 형편이다.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문자의 수요는 절대적 필요조건이 되었을 것이며, 각국의 역사서 편찬으로 그 정점에 달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각국의 금석문 자료는 매우 한정적이며, 신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20년 만에 또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신라 최고最古의 금석문

1988년과 1989년, 경북 울진 봉평리와 영일 냉수리에서 각각 신라시대 석비가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만 20년이 흐른 2009년 5월, 인근 포항에서 새로운 비석이 발견되었다. 연이어 2009년 9월, 200년 전인 1700년대 말에 발견되었다가 어느 때인가 슬그머니 없어졌던 문무왕비의 일부가 경주의 민가에서 재발견되는 경사가 겹치게 되었다. 실로 20년 만에 비슷한 형상으로 신라 금석문 자료가 세상에 드러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포항에서 발견된 비의 발견 상황을 보면 이렇다. 포항시 흥해읍 학성리와 중성리가 만나는 곳에서 도로 개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땅을 고르고 하천을 복개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주변에 있던 일부 석재들이 정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공사 도중 도로변에 살고 있던 주민 김헌도씨가 한쪽으로 치워진 돌들 중에서 면이 편평한 큼직한 판석형의 돌을 발견하고 화분 받침대 등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후 겉에 묻은 흙 등을 제거하기 위해 물로 씻는 과정에서 편평한 한쪽 면에 글씨가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지인들에게 알리게 되고 지역의 학자들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는 발견 후 며칠이 지나 문화재청의 지시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겨 오게 되었다. 옮겨진 비에 대한 정밀 조사를 통해 돌의 재질은 흑운모 화강암으로 밝혀졌다. 높이가 약 105cm, 너비가 약 50cm, 두께는 약 15cm이며, 무게는 약 115kg인 그리 크지 않은 석비였다.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사용한 것으로, 본래의 모습에서 귀퉁이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큰 손상은 없었다. 글자는 앞면에만 있었는데 육안으로도 거의 판독될 만큼 아주 선명하게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비면 중간쯤에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긁힌 자국이 있었다. 경주연구소에서는 이 비에 대해 응급처리와 과학적 조사 등을 실시하고, 탑본과 3D스캔, 그리고 반전기법 등을 활용하여 관계 전문가들과 판독 작업을 진행하여 그 내용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비의 글자는 모두 12행으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새겼다. 아래 약 20cm 정도만이 여백으로 처리되었을 뿐, 맨 윗단부터 한 줄에 적게는 6자에서 많게는 21자까지 모두 203자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밝혀질 듯 말 듯한 역사의 수수께끼

대개 금석문 자료를 대하면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이 그것이 언제 만들어진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제작 연대는 곧 이 자료가 가지는 가치와 역사적 위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처음 이 비가 연구소로 이관되기 전 세상에 알려진 때에는 제작시기를 5-6세기 무렵이라고 추정했다. 비에 보이는 지명이나 신라 관등명 등을 토대로 추측한 것이었다. 연구소로 옮겨진 후 행해진 탑본을 통해 비의 첫머리는 명확히 ‘辛巳(비에는 巳로 표기)’라는 간지干支로 시작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비의 가치를 절반은 해결한 것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쾌거이다. 즉 이 비는 신사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된다. 이제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이 신사년이 절대 연대로는 언제에 해당되는가 하는 것을 밝혀야 한다. 5-6세기에 신사년은 441년, 501년, 561년이 해당된다. 그런데 그 다음에 있던 글자들이 훼손되어 명확치가 않다. 바로 뒤에 있는 두 자 정도는 완전히 마모되었고 나머지 네 자 정도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보는 이마다 조금씩 다르게 볼 수 있을 만큼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이 역사자료가 우리에게 주는 최소한의 배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가르쳐주면 우리들이 고민할 거리가 없을 것을 우려해서인가?

비의 한문은 매우 난해한 상태이다. 몇몇 전문가들이 모여 글자 판독을 하고 해석을 시도했지만 선뜻 명확하게 내용을 제시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전문 한문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여도 속 시원한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이 비가 다른 비와는 달리 문장구성이나 단락구분 등이 용이하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비에는 간지를 비롯하여, 신라의 육부명칭, 지명, 인명, 관등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두 번의 학술회의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논의되었지만 속 시원하게 해결된 점은 많지 않다. 제작 연대에 있어서조차 지증왕 2년에 해당하는 신사년(501년)이라는 입장과 이보다 60년 빠른 눌지왕 25년의 신사년(441년)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다름의 논지를 가지고 전개되고 있다. 어느 경우라도 이 포항중성리신라비는,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의 신라비였던 영일냉수리신라비(503년 제작으로 추정)보다 앞서 제작된 현존 최고의 신라비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별로 이론이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이 비는 당시 이 지역에서 재산(재물)과 관련하여 분쟁이 발생하였고, 중앙정부에서 이에 개입하여 진상을 파악한 후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조치를 취한 후 이를 널리 공표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만약 이러한 평결에 불만을 품거나 어길 경우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강력한 통치권 행사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영일냉수리신라비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당시 중앙에서 지방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한 후 일종의 판례를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아직 본격적인 율령이 제정되어 시행되기 이전에 과도기적으로 행해졌던 신라사회 통치방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이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발견은 절대적인 사료의 부족에 목말라하는 신라사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이를 통해 앞으로 신라사의 장은 한층 넓혀질 것이고, 활기를 띌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이 비에 대한 논의는 막 출발선을 떠나 마치 오랜 마라톤의 여정에 들어선 상태와도 같다. 앞으로 펼쳐질 신라 금석문 연구의 장기 레이스에 기대를 걸어 본다.  


글·사진 | 지병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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