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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민속학의 길을 개척해 나가다
작성일
2017-04-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27

한국 민속학의 길을 개척해 나가다 -  이종철 前 국립민속박물관장·한국전통문화대학 총장 한국 민속학의 제도 확립을 언급할 때 이 사람을 빼고는 논할 수 없다. 그 총화인 국립민속박물관은 이종철 선생의 분신이다. 하지만 그는 문화재관리국에 학예연구사로 첫발을 디디고 한동안은 이곳에서 공직의 길을 갈고 닦았다. 동료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화려해 보이는 고고학에 투신했지만, 그는 외곬으로 민속학의 길을 개척했다.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을 지낸 문화계 마당발 이종철 선생 얘기다. (좌)1981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재직시절 영암 만수리 옹관묘 발굴현장(왼쪽에서 네번째 이종철 선생) (우)이종철 선생

앞만 보고 달려온 공직 생활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1962년 서울대 문리대학 고고인류학과 제2회 입학생이 된 이종철 선생은 졸업하고 1968년 11월 1일 문화재관리국에 입사하면서 오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3월 27일,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되면서 문화재관리국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의 이력에서 독특한 점은 국립민속박물관장을 두 번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1986년 10월 국립민속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94년 7월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잠시 일본유학을 다녀오고, 국립전주박물관장을 지내고는 1998년 4월 다시 국립민속박물관장에 임명됐다. 그 후 2003년 한국전통문화학교(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봉직한 시간만 11년이다.

“저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만 했어요. 어쩌면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셈이지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요. 정신없이 달려왔더니 어느새 정년이더라고요. (정년퇴임) 6개월 전쯤인가? 노태섭(당시 문화재청장) 씨가 총장으로 와달라고 해서 남은 공직생활 내가 뭘 더 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이렇게 해서 이종철 선생은 대학 학과 1년 선배이기도 한 김병모 총장 뒤를 이어 제2대와 제3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으로 2009년 8월 31일까지 6년간 재임했다. 그를 마당발이라 평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성미로도 유명하다.

“문화재관리국 선배인 이호관 관장 후임으로 전주박물관장에 임명됐었어요. 이호관 선생 성격이 어떤지 잘 알잖아요? 같이 일하기 쉽지 않은 분이지요. 관장 이·취임식을 같이 했어요. 한데 선배가 이임사에서 그럽디다. ‘당신들 나 때문에 힘들었지? 이종철은 나보다 더 힘들 거야’라고요. 내가 그리 힘든 스타일인가?”

이 무렵 그에게는 또 다른 제안이 있었다.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이었던 주돈식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당시 저는 도쿄대 유학을 가 있었지요. 허리 디스크 때문에 도저히 육체적으로 버틸 수가 없는 시기였어요. 통증으로 하루 4시간도 잘 수 없었으니깐. 주 장관이 제 뒷조사를 좀 했나 봐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이나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가라고 합디다. 도저히 갈 수가 없는 몸 상태여서 거절했죠. 주 장관이 저를 괘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대신 고향으로 보내 달라 했어요. 다 아는 사람들이라 일하기 한결 수월할 수 있으니까요. 한데 누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너 때문에 네 조카들 결혼도 못 시키게 생겼다. 삼촌이 저리 독하다고 소문나니 애들이 어떻게 결혼을 하겠느냐’고.”

배움으로 문화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을 채우다

이종철 선생의 이력에서 이채로운 점 중 하나가 보존과학 분야에 심혈을 쏟았다는 대목이다. 1975년 학예연구관 승진과 더불어 1982년까지는 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보존처리 쪽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하는 이종철 선생. 그 무렵 1981년 8월 25일에 국립문화재연구소 부설기관으로 목포보존처리장(현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이 개설됐다.

“유운소 문화재관리국장이 보존과학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마침 그때 신안선을 발견했잖아요? 목선 보존처리가 시급했고 그래서 목포보존처리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종철 선생의 해외 연수 이력을 보면 1979년 2월 27일부터 같은 해 9월 2일까지는 덴마크 교육성 초청 박물관학 연수를 한 것으로 나온다. 그 시절 덴마크를 선택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한국과 덴마크 문화교류 협정이 체결되면서 박물관 전문가 교환이 있었어요. 민속관 분야에서는 덴마크가 미국보다도 훨씬 앞서 있었죠. 스칸센 민속관도 유명했으니, 그런 현장을 보고 배워야겠다 싶어서 지원했지요. 용인 민속촌을 만들 때 제가 관여를 했는데, 그걸 지켜보면서 우리가 진짜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 무슨 이론을 가지고 주장을 하려면 제가 충분히 알고 있어야 했어요. 마침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하던) 김병모 선생이 유학 중이라 유럽에서 모였죠.”

그는 덴마크에서 “원 없이 배우고 원 없이 봤다”고 한다. “덴마크의 좋은 박물관은 그때 다 봤어요. 거기에서 아이디어와 영감을 많이 얻었어요. 연수 생활을 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과 같이했는데 그 양반은 연수 기간이 4개월이었죠. 참 인품 좋으신 분이에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 퇴임 뒤에는 서울시 산하 한성백제박물관 건립개관추진단장으로서 개관 제반 준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공직자로서는 해당 분야에서 모든 것을 이룬 듯한 그이지만 아쉬움도 많다. 무엇보다 미군이 반환할 용산민족공원으로 국립민속박물관 이전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고 한다.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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