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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태권도의 문명사적 의의와 택견의 미래 가치
작성일
2012-04-1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780

 

몸과 마음을 기르는 생활 속의 도道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태권도를 즐기는 배경에는 올림픽 메달 이외에 생활 속의 도를 만나는 데 있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해외에서 태권도를 선호하는 요인이 ‘오리엔트적 이질성’이라고 분석한다. 서구인들은 노동시간 외에 거의 여가 시간을 즐기지만, 집단적인 의례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태권도는 사범과 수련생의 위계질서, 고된 수련, 인사하기와 같은 집단 의례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 점이 서구인에게 낯설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후기 자본주의의 기계화된 사회에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태권도와 같은 동양 무술에 욕망을 느끼는 이유다. 이미 종교와 교육의 진정한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인간 관계의 긴밀성, 단체적 의례생활 등 공동체성을 상실한 서구인들에게 태권도와 같은 동양무술이 개인적 고립, 허탈의 감정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히는 태권도는 탁월한 무도스포츠다. 일정한 규칙 아래 위험성을 제거한 채 손과 발, 그리고 온몸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공격과 방어를 펼침으로써 인간 내면의 공격적 본능을 해소하고 정신을 정화시켜 인격을 닦는 효과가 크다. 현재 올림픽 종목 26개 가운데 그 같은 기능은 태권도 말고는 거의 찾기 어렵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 채택된 까닭도 바로 그러한 가치와 우수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품새, 격파, 겨루기의 수련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심신 단련과 인내, 그리고 그 너머 존재하는 자아완성의 세계는 태권도가 갖는 본질이자 정체성이다.

 

외래무술의 주체적 수용과 창조적 변용
태권도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이 땅에서 새롭게 탄생한 근대무술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에서 가라데(당수)를 익힌 무술인들이 해방 직후 귀국하여 서울과 개성 등지에 도장을 열면서 한국화를 추진한 것이 태권도의 시작이다.

한국화의 첫 단추는 새 명칭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때 영향을 준 무술이 바로 전통무예 택견(태껸)이다. 1954년에 육군의 가라데 시범을 관람한 후 이승만대통령이 어린 시절에 본 ‘태껸’ 을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태권도가 출현하였다. 당시 육군장성 최홍희는 택견을 한문으로 ‘태권跆拳’으로 바꾸고, 여기에 도를 합쳐 태권도를 탄생시킨 것이다. 1955년 태권도의 명칭 제정은 가라데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한국 무술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 후 태권도는 가라데의 형, 대련, 정권 등 기술 용어를 품새, 겨루기, 주먹 등으로 용어를 개정하는 한편, 형과 격파 위주의 무술 수련체계에서 겨루기와 발 중심의 경기 수련체계로 전환하였다. 당시 동양의 무술은 오랜 전통에 묶여 근대 스포츠로 나갈 생각조차 못하였다.

더구나 무술은 일격필살의 위험성이 있어 겨루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자 가라데의 경우,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겨루기를 할 때 상대방의 타격부위 앞에서 멈추는 자세인 촌지寸止를 사용함으로써 겨루기의 형식화를 초래하였다. 중국 권법(우슈)은 격투기에서 예술성을 강조하거나 기공체조 위주의 무술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태권도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무술의 경기화를 추진하였다. 실전용 겨루기를 과감하게 도입하되, 선수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손 기술을 지양하고 발 기술 위주로 겨루기 방식을 체계화하였다. 이 같은 결과는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태권도가 전통무예 택견의 발기술과 겨루기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의 고유한 택견의 무술적 전통이 태권도의 스포츠화를 이끌어낸 배경이 된 셈이다.

태권도가 일격필살의 무술에 머물지 않고 겨루기 중심의 경기태권으로 나간 사실은 한국 무술의 성공 신화를 넘어 동양무술의 스포츠화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산타散打와 일본의 가라데가 경기무술로 나간 까닭은 태권도의 경기화 성공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와 같이 태권도는 해방 후 가라데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한국화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에 전통무예 택견의 놀이 특성을 반영한 발차기와 겨루기 중심의 경기무술이라는 창조적 변용을 달성하여 보편적인 스포츠의 가치를 구현하였다. 그럼으로써 태권도는 불과 50년만에 한국의 얼과 혼이 담긴 무술이자 전 세계인이 즐기는 무도스포츠로 성장·발전해 나갔다.

 

태권도의 문명사적 사건과 택견의 미래 가치
태권도는 초창기부터 한국화와 동시에 세계화를 추진하였다. 1958년 국군태권도시범단이 조직되어 동남아 순회시범을 하던 태권도는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결성하는 등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함께 1975년에는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던 가라데를 따돌리고 국제경기연맹(GAISF)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스포츠계에 공식적인 명성을 획득하였다. 이어 두 차례 올림픽 시범 종목을 거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정식종목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화에 성공하였다.

이제 태권도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의 몸 기르기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실제로 태권도는 현재 전 세계 185여 개국에서 8천만 명 이상이 즐기고 있는 세계적인 무도스포츠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남녀노소 누구나 심신수련을 통해 자아완성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태권도의 보급이야말로 분명한 21세기 문명사적 사건이자 의의인 것이다. 그 결과 태권도는 한국을 알리고 다양한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소통의 창구로 기능하였다. 태권도가 일찍이 세계화에 성공한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20세기 세계스포츠의 흐름이 ‘서양스포츠의 세계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동서양 스포츠의 조화로운 공존의 시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비전과 전망을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태권도다. 21세기를 여는 첫 올림픽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사실은 향후 새로운 천년에 동서양 모든 나라들의 전통 스포츠와 무술, 그리고 놀이들이 존중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한 시대적 추세 속에 2011년 11월 유네스코가 한국의 택견을 인류무형유산에 선정하였다. 무술이 인류무형유산에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중국의 소림사 무술(쿵후)을 제치고 선정되었으니, 한국의 전통무예가 갖는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가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다. 이미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택견은 전쟁의 살상기술이 아닌 민간에서 씨름과 함께 즐기던 고유한 무술이요, 신나는 놀이문화다. 춤추듯 능청거리는 품밟기, 활갯짓, 발질은 택견의 기술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상대와의 겨루기를 위한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몸짓이자 살상의 기술이 아닌 활법活法의 세계다.

전국의 민간에서 주로 놀이로 발달해 온 택견은 형식미보다 자연미를, 살상보다는 활력을, 그리고 승리보다는 갱생을 우위에 둔다. 택견에 내재화된 어울림과 상생의 원리는 몸을 지나치게 단련하여 월계관을 쟁취해 내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에게 스포츠 현실을 성찰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택견은 이제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자랑스러운인류무형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택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인류무형유산 선정을 계기로 택견을 비롯한 무형유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보급을 위해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글·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한국사 교수, ICOMOS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한국무예연구소장
사진·문화재청, 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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