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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침략의 방어 요새 역할을 한 산성, 어떻게 쌓고 변화했을까?
작성일
2017-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904

침략의 방어 요새 역할을 한 산성, 어떻게 쌓고 변화했을까?  도심 한복판에 여전히 그 모습이 남아 있는 남한산성이나 수원화성을 보며 과거 이 지역의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다. 외세의 침입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방어 역할을 해온 산성. 어떻게 쌓아 올렸으며, 시대별로는 어떤 모습으로 차이를 보였는지 산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Q. 산성의 재료인 돌은 어떻게 운반하고 쌓아 올렸는지 알고 싶어요.

성벽을 쌓을 때 돌은 성벽의 겉면을 이룬 면석(겉돌, 얼굴 돌:面石), 면석과 속을 채우기 위해 쪼갠 돌(할석:割石) 사이를 끼워주는 북돌(베짱이 돌, 사석:梭石), 돌의 길이를 길게 하여 겉돌과 북돌, 채운 돌을 한 덩이로 해서 벽을 견고히 하는 긴 돌(심석攳:石) 등이 있습니다.

돌을 모으는 작업에는 돌 줍기(습석:拾石)와 돌 캐기(채석:採石)가 있고요, 줍거나 캔 돌을 운반하는 작업을 운석(運石)이라 하지요. 각각의 작업마다 많은 기술자와 인력, 도구가 필요합니다. 돌을 사용 목적에 따라 다듬는 작업을 치석(治石)이라 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석장(石匠), 석공(石工)이 있습니다. 작업 구역을 나누어 책임자와 감독자, 일꾼이 정해져 돌을 쌓았으며, 그 작업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던 것이 삼국시대의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돌을 운반할 때는 수평 운반에 각종 썰매나 바퀴 달린 도구가 이용됐고, 수직 이동에는 지렛대와 도르래가 널리 사용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Q. 산성의 주된 재료가 돌이 아닌 경우도 있나요?

산성 축조의 재료로 돌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큰 구덩이를 촘촘히 판 후 기둥처럼 나무를 세워 다진 나무울짱(목책:木柵)도 성벽 구조에 나타났으며, 흙을 다져 성벽을 만들기도 했죠. 흙을 넣고 다지는 성토(盛土)와 보다 치밀한 구조를 위해 거푸집이 등장했으며 진흙과 모래가 섞인 흙을 교대로 넣고 다지는 판축(版築)기법이 즐겨 사용되었지요. 이런 작업에는 거푸집을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목책 다음으로 흙을 다지는 토성이 축조되고, 자꾸 무너지는 단점을 보완하면서 돌로 쌓는 석축으로 발전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Q.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 산성은 어떤 점이 달랐나요?

산을 의지하거나 산 위에 쌓은 성을 평지에 있는 것과 구분해서 산성이라 하면, 다른 나라에도 산성이 많이 있지요.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중세 유럽의 저명한 성들도 거의 모두 전술상의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했습니다. 평지에 솟은 구릉과 산의 정상은 지형적으로 멀리까지 관찰하기 용이하고, 적을 방어하기도 쉬우니까요. 이웃한 중국에서도 성곽이 나타나는 초기에는 산성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특별히 산성을 이용한 전략을 발전시켰습니다. 살림살이를 하던 곳 부근의 산 위에 전쟁을 대비한 창고를 만들어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가, 적이 침입하면 곧바로 산성으로 들어갔죠. 그렇게 우리는 들판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방법(청야입보농성:淸野入保籠城)에 능숙했어요. 적군이 가져온 양식이 없어져 퇴각할 때 산성에서 내려와 후퇴하는 적을 앞뒤에서 괴롭히는 전술(기각지세:掎角之勢)을 잘 활용하여 대규모로 침략하는 적을 물리쳐왔습니다. 고구려에서 발전한 산성을 이용한 전통적인 전략은 고려와 조선왕조 말기까지 줄곧 이어졌지요.

Q. 시대별 산성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산성은 고대부터 조선왕조 말까지 역사변천과 함께 변화되면서 발전했습니다. 고대에는 고구려가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역까지 산성을 축조했고, 백제는 일본 서부지역에 산성을 축조하였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산성의 분포범위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 한반도와 일본 서부지역까지입니다. 고구려의 산성은 내부적으로는 도성(都城)과 지방 통치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면서, 대외적으로는 한(漢)이래 수(隋)와 당(唐)의 침입을 막아낸 방파제의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때도 거란족의 침입으로 도성이 함락된 경험을 통해 산성을 아우르는 도성제를 운영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몽골족의 대대적인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각지에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파견해 전국의 산성을 요새화하여 수십 년 맞서 싸웠습니다. 산성은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만 효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왜구의 피해가 커질 때도 지역 주민들이 들어가 지키는 곳이 되었어요.

조선시대에는 국방시설을 철저히 마련하느라 도성·읍성과 국경지역의 영(營)·진(鎭)·보(堡)에도 성을 쌓아 산성 중심의 전략을 일부 대체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산성의 효용을 재평가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양도성도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가지게 되고, 전국에 약 40곳의 대규모 산성이 운영되었어요.

Q. 산성의 형식에 따른 용도와 기능을 알고 싶어요.

조선시대 후기부터 산성을 여러 유형으로 나눴습니다. 크기에 따라 작은 것의 경우 망을 보거나 초소로 이용하면서 연락용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미 삼국시대에 수백 미터의 작은 산성부터 둘레 10km에 이르는 큰 산성까지 다양하게 축조되어왔습니다. 산성의 용도와 기능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구역 단위와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산성의 형식을 성이 위치한 산의 모양에 의해 고로봉(栲栳峰)➊·사모봉(紗帽峰)➋·마안봉(馬鞍峰)➌·산봉(蒜峰)➍의 형태로 나누기도 하고, 계곡까지 에워싼 포곡(抱谷) 형식과 봉우리에 테를 두른 시루 뫼나 테 뫼(산봉우리 위를 성벽이 돌아간 모습이 솥 위에 시루를 얹은 모양, 밥그릇을 엎어 놓은 모양) 형식 등 여러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형식별 용도는 상관관계가 있겠으나, 입보농성을 위한 산성은 고로봉 형의 산세에 포곡 형식으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소규모의 산성도 고대에는 군사 주둔지나 작은 규모의 도시였다는 것이 발굴조사 결과 점점 밝혀지고 있습니다.

➊ 고로봉 : 고리짝같이 4면 주위가 높은 산등으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긴 지형 ➋ 사모봉 : 사모(조선시대 관리가 쓰던 모자) 모양으로 뒤에 산이 가로막히고 앞은 평지로 되어 있어 그 등성이와 평지에 걸쳐 성을 쌓을 수 있는 지형 ➌ 마안봉 : 말안장 모양으로 산마루의 양쪽이 높고 중간이 약간 낮은 지형 ➍ 산봉 : 마늘 밑동 모양으로 정상부에 넓은 대지가 있고 그 둘레가 깍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른 지형

 

글‧차용걸(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한국 성곽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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