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숨겨진 문화재의 보고寶庫 괴산槐山
작성일
2006-09-0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613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괴산편) 2 숨겨진 문화재의 보고寶庫 괴산槐山 천 년의 신비를 그대로 품고 있는 고찰, 각연사覺淵寺

충주를 지나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칠보산과 보개산, 그리고 그 뒤에 덕가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그 속에 숨어있는 사찰인 각연사였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의 각연사는 주말임에도 찾는 이가 별로 없이 한가하여 진정한 산사를 만나는 설렘을 안겨준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특이하게도 공양간의 장독들이 즐비한 후원과 담쟁이가 드리워진 화장실이 소탈한 절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돌계단을 오르면 가파른 뒷산을 배경으로선 대웅전(충북유형문화재 제126호)이 온화한 느낌으로 자리하고 왼편으로는 목어와 함께 종각이 단아하게 놓여있다.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유일대사가 창건한 각연사에는 창건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그 신비함을 더한다.

유일대사가 이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절골)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날아들어 자꾸 대팻밥과 나무부스러기를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기이하게 여겨 까마귀들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각연사 자리 연못에 대팻밥 등이 떨어져 있어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연못 안에 석불이 하나 있고 그로부터 광채가 퍼져 나왔다. 이에 유일이 깨달은 바가 있어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이 절이 각연사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름 역시 깨달을 ‘각覺’에 연못 ‘연淵’을 써서 각연사覺淵寺라 하였는데 그 연못자리는 대웅전의 우측에 위치한 비로전(충북유형문화재 제125호)이라는 주지의 설명이었다. 이 비로전에는 그 유명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이 안치되어있다. 9세기 전형의 화강석 비로자나불이지만 얼굴이나 옷 주름은 10세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불상의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이 깊은 인상을 주며 광배의 구름무늬와 불꽃무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느낌을 준다. 비로전 앞마당에는 우람한 보리수가 서 있어 절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거찰巨刹이라고 부르기에는 소박한 각연사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말고도 보물이 두 개 더 있다. 바로 통일대사탑비(보물 제1295호)와 통일대사부도(보물 제1370호)가 그것이다. 그것이 있는 위치는 칠보산과 덕가산이 만나는 중턱에 있는데 뱀이 자주 출몰하여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절의 살림을 돕고 있는 한 처사의 안내로 그곳에 오를 수 있었다. 통일대사탑비는 고려 전기의 고승인 통일대사를 기리는 비로 대사 입적 후 당시 왕이던 고려 광종이 당대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원래 해서체로 각자된 3,500자의 비문은 거의 깎여나가고 260여 자만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받침돌은 거북이 형태이고 머릿돌은 네 면에 용의 형상을 깎아 새겼다. 통일대사부도는 탑비가 있는 곳에서 동남쪽인 보개산 주봉을 향해 30분간 더 올라가야 만날 수 있었다. 부도는 원래 훼손되어 근처에 흩어져 있던 것이 1965년에 발견되어 괴산군에서 파편들을 수습하고 1982년에 복원한 것인데도 각 부를 구성하는 부재들의 형태가 완벽하여 신기함을 자아낸다. 부도는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구비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로 상륜부의 두툼하게 표현된 기왓골이 인상적이다. 각연사를 내려오면서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을 보니 마음이 고요해지고 더위는 어느덧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그 독창성으로 조선시대 후기 사대부의 생활문화를 표현한‘괴산김기응가옥’

각연사를 나와서 다음으로 찾은 곳은 칠성면 율원리에 있는 ‘괴산김기응가옥槐山金璣應家屋(중요민속자료 제136호)’이었다. 문경방향의 국도 19번과 34번의 분기점에서 34번 국도로 3km를 달려 우회전하면 525번 지방도로가 나오고 400m 지나면 우측으로 마을이 나타난다.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양지바른 쪽에 아담한 모습의 고택이 바로 ‘김기응가옥’이다. 하지만, 전체 규모는 매우 큰 편으로 본래는 1610년에 지어진 가옥을 1910년경에 김기응의 조부가 매입, 개보수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11칸의 행랑채가 길가로 나있어 외부와 가옥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고 외벽은 지방에서는 드문 화장담인 것이 특징이다. 대문을 들어가면 행랑마당보다 높은 터에 담장이 둘러 처져 있고 사랑채가 자리한다. 서쪽에 중간행랑채가 내외담을 통해서 안 행랑마당으로 연결한다. 사랑채를 담장으로 두른 것은 행랑마당과 분리시키기 위한 것으로 사랑채가 드러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사랑채에서는 안채로 출입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또한, 행랑마당의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행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에 중간마당을 두었다. 결국, 사랑채의 뒷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행랑마당을 통해서 중간 행랑마당으로, 그다음 안마당을 통해서 가야만 하는 동선이 복잡한 미로의 형태를 띠어 가옥 전체적으로 매우 깊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번 정읍에서 본 ‘김동수가옥’과 전체적으로 유사한 느낌이 들지만 화려하고 웅장한 조선시대 초기의 가옥에 비해 세부적으로 매우 조밀하고 독특한 양식을 띠고 있어 조선시대 후기 반가고택班家古宅의 중요한 연구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혜로우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전통가옥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이제는 직각 위주의 아파트나 서양식 가옥에 갇혀 사는 도시인의 비애가 더한층 느껴진다.

글 _ 편집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