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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독자의 소리, 7월 가족과 함께하는 전통 문화 공연·전시
작성일
2019-07-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43



2019년 6월호 독자 의견입니다.


·김*아 / 울산광역시 중구 북부순환도로

미디어 속 문화재 코너에서 영화 촬영지를 토대로 역사적 사실과 흥미로운 이야기도 접할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근대기 건축물로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한 점이 인상깊었고, 군산여행을 가게되면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영 / 대구광역시 달서구 화암로

가요 프로그램을 보던 중 가요와 해금의 콜라보레이션을 보게 되면서 해금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해금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악기라는 차영수 명인의 얘기가 마음에 닿습니다.


·조*영 / 경남 진주시 남강로

차영수 해금 명인이 소개된 특집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제 아들이 해금을 전공으로 삼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아들이 연주하는 해금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고맙습니다.


·서*숙 / 경북 고령군 우곡면

철의왕국 가야에 대한 기사를 보고 우리 고장의 내용이라서 더욱 정겹고 눈길이 갔습니다. 대가야에 대해서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학문적으로 알게되었습니다.


·김*아 /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김명국의 달마도 이야기가 깊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달마도를 그린 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는 너무 다른 조선시대 예술가의 삶을 잠시나마 대리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전*호 / 제주시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암울한 역사의 흔적이 남은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의 기사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아픈 흔적이지만 앞으로도 잘 관리해서 후손들에게 역사적 가치를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재가 있는 풍경]


한 편의 한국화를 담은 절경 영월 선돌


영월 방절리 서강가의 절벽에 자리한 선돌.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불리는 70m 높이의 커다란 입석은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개 내리다 그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입석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기암은 선돌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시선을 돌려 아래를 바라보면 절벽과 입석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강물이 또 한 번 감탄을 자아낸다. 1820년(순조 20) 문신 홍이간이 영월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문신이자 학자인 오희상과 홍직필이 그를 찾아와 구름에 싸인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읊고, 암벽에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도 전한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가는 길에 선돌 인근에 들렀는데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선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일뿐이지만 단종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것만은 분명하다.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진 선돌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금강산의 일부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영월 선돌>

  • 소재지: 강원 영월군 영월읍 하송로 64
  • 문의처: 영월관광안내 1577-0545
  • 주변 볼거리: 장릉, 청령포, 별마로 천문대, 어라연, 고씨굴
  • 관련 웹사이트 : http://tour.namhae.go.kr

[이달의 문화재 행사]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孝明) 어린 나이에 부왕인 정조를 여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 속 에서 힘겹게 왕위를 지켜가고 있던 순조(재위1800~1834)에게 1809년 태어난 장남 효명세자 (1809~1830)는 왕실의 희망이었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총명하며 효성스러운 세자에게 순조는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관심 속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왕위의 굳건한 계승자로 성장해갔습니다. 효명세자가 19세가 된 1827년에는 순조를 대신해 공식적으로 정사를 돌보는 대리청정을 시작해 문예를 숭상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대리청정 3년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이 기간 동안 정치 문학 회화 건축 궁중잔치와 정재 분야에서 이룩한 효명 세자의 업적은 정조(재위 1776~1800)를 잇는 또 한 명의 뛰어난 문예 군주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예 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은 효명세자의 삶, 정조에 버금가는 문학적 성취, 궁중잔치와 궁중 정재 분야에서의 괄목할 만한 업적, 궁궐 영건과 이들 건축물을 통해 효명세자가 추구한 삶의 지향등을 다양한 유물과 문헌, 영상을 통해 소개합니다 . 이번 전시가 문예 군주를 꿈꿨던 효명세자의 짧지만 찬란한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01. 효명세자 관례 그림 《수교도첩》 ⓒ국립고궁박물관 02. 효명세자의 편지글 모음 『익종간첩』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03. 정재를 공연한 여령이 입었던 복식 몽두리, 한삼, 대대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족학박물관 (GRASSI Museumfür Völkerkunde zu Leipzig,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



  • 기간 : 2019. 6. 28. (금) ~ 2019. 9. 22. (일)
  • 장소 :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1. 효명세자의 생애

효명세자는 1809년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12년 네 살의 어린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어 왕실을 이어나갈 존재임을 명확히 하였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왕위 계승자로 성장해갔다. 1819년에 는 경희궁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행하고,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1808~1890)를 세자빈으로 맞아 가례를 행했다. 효명세자가 19세가 되던 1827년 2월 순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안동 김씨의 외척세도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시도한 정치적 조처였다. 세자 또한 학문을 중시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위해 힘을 기울였으나 대리청정 3년 만인 1830년에 2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2.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시인, 효명

효명세자는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20년 남짓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400여 제(題)의 시를 남겼다. 궁궐 내외에 그가 자주 방문하던 누각이나 정자,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과 계절의 변화는 그가 지은 시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효명세자는 세자시 강원 이나 세자익위사 소속 관료들과 함께 한 구절씩 이어서 짓는 연구(聯句) 형식의 시도 다수 남겼다.


3. 궁궐도에 나타난 효명세자의 공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궁궐 곳곳의 모습도 새로워졌다. 효명세자는 연경당(演慶堂)을 짓고 자경전(慈慶殿)을 증축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며, 서실인 의두합(倚斗閤)을 지어 독서하며 여가를 보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동궐도(東闕圖)》에는 그와 관련된 건물들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동궐도와 화풍이 유사한 〈서궐도안(西闕圖案)〉에도 효명세자의 생애와 관련된 공간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4. 궁중잔치의 개최와 궁중정재의 창작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1년에 한번 이상 잔치를 베풀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1827년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서는 작은 규모의 잔치인 ‘진작(進爵)’을 새로이 명명하고 절차 를 마련했다. 1828년 순원왕후의 사순(四旬)[40세] 기념 잔치에서는 밤 잔치[야진(夜進)]와 준비자를 위한 잔치[회작(會酌)]를 처음으로 행했다. 1829년에는 순조의 사순과 즉위 30년을 기념하여 대리청정 기간 중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1828년과 1829년 잔치에서는 효명세자의 명으로 다양한 궁중 무용[정재(呈才)]이 창작되었다. 효명세자는 여기에 직접 지은 노랫말[악장(樂章)]을 붙여 잔치와 정재 창작을 주도한 왕세자로서의 권위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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