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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고 가꿨던 우리 민족의 공생의 역사
작성일
2013-01-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117



자연과 동화하는 조상의 삶

우리 조상은 택지를 선택할 때도 자연을 변형시키기보다는 좋은 환경을 찾아 함께 동화하려 했다. 건물을 지을 때도 자연에 대한 정복이 아니라 자연에 엉덩이를 슬쩍 디밀어 걸터앉는 삶이었다. 우리 조상은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생금단殺生禁斷, 불살생계不殺生戒라 하여 가능하면 살생을 금하고 자비의 정신과 생물에 대한 사랑을 가졌다. 심지어 먼 길을 떠날 때 짚신을 많이 준비해 가는데 개미 등 작은 생물들이 밟혀 죽는 것을 염려하여 다섯 개의 굵은 새끼줄로 올을 느슨하게 만든 오합혜五合鞋를 신었다. 이는 불교적 교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냉혹한 현실에서도 인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실체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나이든 나무는 신령이 깃든 나무라 하여 보호했고 특히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등의 고목古木에는 금줄을 치고 소원을 빌면서 신성시했다. 나무 위 새집의 새알을 슬쩍할 때도 새집은 꼭 그대로 두도록 했다.

각종 나무와 식물에도 상징성을 부여하여 그 나무의 생김새와 가치를 극대화했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데 흔히 오동나무는 시집 보낼 때 장롱을 만들려 한다지만 다른 속내도 있었다.

오동나무는 봉황목鳳凰木이라 하여 큰 손님을 맞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속담에 큰 손님은 사위라고 한다. 즉 오동나무는 자신의 딸이 큰 손 님인 봉황(임금)을 맞이하기를 바라면서 집 어귀에 심어 손님을 맞는 귀중한 나무로 길렀다. 대추나무를 심어 자손의 번창을, 앵두나무를 심어 형제간의 우애를, 목백일홍은 자미紫薇라 하여 제왕이 맑은 정치를 하기를 기렸다. 목백일홍의 줄기 껍데기는 시간이 갈수록 없어져 빤빤해짐을 빗대어 치부하지 않는 청렴한 정치를 소망했다.

궁궐이나 마을, 주택도 생태적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등에는 궁궐을 풍성楓城이라 하고, 왕이 승하하여 유택이 있는 왕릉은 송성松城이라 불렀다. 즉 궁궐은 단풍나무로 왕릉은 소나무로 상징화하여 왕실공간을 자연의 공생적 공간으로 이해했다.

단군 이래 우리나라는 동양의 전통사상인 자연숭배사상의 영향으로 자연 친화적自然親和的인 생활공간을 꾸며왔다.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된 자연과 생태계를 이해하는 자연동화적인 대표적 사상이 고려의 풍수 사상과 음양오행사상이다.



도읍과 마을로 이어지는 산줄기 능선의 수림을 잘 보존하기 위해 산불을 내거나 화전火田을 하는 사람들에게 엄벌을 가해 산림의 용맥(산줄기)을 보 존하려 했다. 촌락은 생태적 근원인 마을의 개울을 따라 조성되며 동서 남북이 산으로 감싸여 있는 포근한 자연마을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매화꽃이 사방에 떨어져 자손이 발복한다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니 고귀한 연꽃이 떠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같은 자연의 형태를 닮은 지형에서 살기를 선호했다.

마을과 주택도 생태 순환적으로 조성하였다. 마을의 입구에는 정자목, 물레방아, 서낭당, 열녀비 등이 자리하고 마을의 도랑을 건너 어귀에 들어서면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어 마을 생산 공간인 들(버덩)을 지나 마을에 이르면 마을 뒷동산에는 미둥지가 있어 사자의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연료의 공급처가 되기도 하였다. 마을길은 자연 지세에 따라 굽어 있어 걷기에 재미를 더해 주었다.

우리는 집을 가정家庭이라 표현하여 집과 뜰을 합하여 표현한다. 우리 조상은 뜰속에 집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뜰을 더욱 중요시 여겼다. 명당明堂이라는 글자의 표현도 날 일日과 달 월月이 합친 즉 해와 달이 들어오는 마당에서 비롯된다. 건물의 안보다는 마당에서 밝은 해와 달의 빛을 받으려 했다.

우리 전통주택의 꾸밈새를 보면 자연의 순환체계와 생활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솟을대문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행랑채가 자리 잡으며,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협문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에 이른다. 가장 높은 안채 뒤쪽 구석진 곳에 별당이 위치하고 뒤편에는 후원을 만들어 생태적 공간을 꾸며 나갔다.

바깥마당 앞에는 방지方池형태의 연못을 조성하여 집에서 쓴 쌀뜨물과 허드렛물을 이곳에 버렸다. 연못 안에는 연꽃과 미나리 등 정화식물을 심어 물을 정화하였다. 이 물은 마을 입구 큰 연못에 이르러 다시 정화 하여 버덩의 논밭을 거쳐 큰 개울로 이르도록 했는데 완전히 정화하여 개울물에 들게 하였다.



예전에는 집안에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수종을 엄격히 가리는 풍습이 있었다. 나무들은 나쁜 바람을 막아 주고, 좋은 기를 길러 주기 때 문에 풍수적 경관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중문 앞에 괴목槐木(느티나무, 회화나무)이 있으면 정승을 배출하며 3대에 걸쳐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며 사랑마당에는 석류石榴와목단牧丹나무를 심었다. 사랑 마당가에는 남정네와 손님을 위해 매화, 난초, 국화, 대나 무를 심어 검소함과 우애와 절개를 상징했으며 바깥마당에는 자미화 紫薇花(배롱나무), 매화나무, 대나무를 심고초정草亭을 지어 유유자적하였다.

사후에도 생태적 공생의 원리를 존중한 우리문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온화한 기후와 산수가 좋은 곳에 자 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행복한 삶을 꾸리기를 원한다. 또한 사후에도 양지바른 명당자리에서 영면하기를 원한다.

왕릉에는 소나무를 심어 왕조의 영원성을 기렸으며 성묘온 후대의 왕들에게는 왕실의 사적인 일에 치중하기보다는 공적인 일에 치중하라는 뜻의 소나무 송松자를 붙였다. 즉 나무 목木에 공적인 공公을 썼 다. 소나무는 노송이 되면 아래로 감싸 품어 포근함을 준다. 즉 백성들을 거대한 소나무 그늘로 품어 안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소나무는 키가 크면 아래에 다른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 소나무가 일정한 화학물질을 생성하여 타식물들이 발아할수없도록 타감작용 他感作用을 한다. 그래서 소나무 밑에는 곤충들 서식이 어렵다. 곤충서 식이 어려우니 개구리들이 별로 없고 뱀과 전갈 등도 없다.

산소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조상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력을 볼 수 있다. 소나무 아래는 선왕(조상)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잠이 잘 오는 나무인 때죽나무를 심었다. 능침 주변을 제외한 그 외의 많은 능역에 는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잘 보존한 천연 경관림景觀林을 조성하여 가꾸었다. 대표적인 나무가 참나무이다. 참나무는 산불에 강한 수종 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에 가면 유난히 참나무가 많다. 정조가 아버 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을 꾸미며 참나무를 많이 심었다. 참나무는 수목학 사전에 한자명으로 상橡이라 한다. 이는 참나무 줄기의 표피가 코끼리 다리처럼 두둘두둘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참나무는 한자 사전에는 나무 목木과 즐거울 락樂이 합쳐진 력 이라쓰기도 한다.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장조)가 뒤주 속에서 돌아가심을 슬퍼하며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가 죽어서라도 능원에서 즐겁게(樂) 쉬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융릉에는 능침 앞을 가로 막는 정자각도 빗겨나고 울타리인 난간석도 없고 봉분의 병풍석에 많은 꽃을 조각해 놓기도 했다. 오만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은 자연의 미물을 중히 여겨 한 가지의 꽃도 꺾지 않고 벌레도 잡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그는 초 서草書와 초충도草蟲圖를 병풍에 그려 자연을 감상하였다 한다. 우리 조상의 대표적인 자연사상이며 공생의 원리이다.



글·사진. 이창환 (상지영서대학교 도시조경인테리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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