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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조화와 화합의 세상을 꿈꾸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의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작성일
2022-03-3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88

조화와 화합의 세상을 꿈꾸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의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2021년 6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는 또 하나의 국보 문화재를 보유하게 되었다. 바로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求禮 華嚴寺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이다. 화엄사 대웅전의 세 불상은 조선시대 1635년 완성되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가 된 문화재이다. 흔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시대라고 여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국보 문화재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01.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

화엄사 대웅전의 세 부처

지리산 노고단을 오르는 길에 위치한 화엄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으뜸이요, 천년을 훌쩍 넘긴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위엄과 정통성을 자랑한다. ‘화엄(華嚴)’은 잡화엄식(雜華嚴飾)을 줄인말로 ‘갖가지 꽃으로 장엄한다’라는 뜻이 담겼다. 불교에서의 화엄은 부처님 말씀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고 커서 모든 중생과 사물을 아우르고 있기에 마치 온갖 꽃으로 가득 장식한 것과 같다고 하며, ‘너와 나’ 일체의 모든 만물이 하나로 융화되는 것을 의미 한다.


화엄사는 경전 속 화엄 세계를 구현한 가람(伽藍)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화엄을 표현한 상징적인 문화재 두 가지만을 꼽는다면 각황전(본래 이름 장륙전)의 네 벽을 둘렀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이 그 첫 번 째요. 다른 하나는 대웅전에 모신 세 부처,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들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가람이 전소된 후 1636년 중심 법당으로 지어졌으며 남아 있는 화엄사 건축 중 가장 오래된 집이다. 지붕 아래 걸린 현판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쓰여 있고, 내부 불단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 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 한 세트를 이루는 ‘삼신불(三身佛)’이 앉아있다. 3m에 가까운 초 대형 삼신불상은 나무로 만든 후 금옷을 입혔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상은 손가락을 가슴 앞에 모아 지권인(智拳印) 을 취했으며, 노사나불상은 양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벌린 채 보관을 쓴 보살 형태이고, 석가모니불상은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으로 조형되었다.


이러한 세 불상의 조합은 국보가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삼신불(비로 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상을 조성하면서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발견돼 불상의 이름을 더욱 정확히 명시하고 있어 불교 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로 볼 때 국보로서 손색없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02.구례 화엄사 목조노사나불좌상 03.화엄사 노사나 불상의 시주질

대웅전 불상 조성에 얽힌 인물

반가사유상이나 석굴암의 부처 등 고대 불상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후기 불상과 조우 할 때 간혹 평면적이고 덩어리진 조각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 불상의 얼굴을 좀더 가까이 올려 다보라. 조선 후기 불상의 얼굴에는 불상을 만든 승려의 개성이 숨어 있어 그 차이를 찾아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화엄사 대웅전의 세 불상도 발원문 묵서의 ‘시주질’을 통해 승려 장인의 이름이 밝혀져 더욱 흥미를 끈다. 이 기록은 화엄사 대웅전 불상의 서사를 완성시키면서 국보가 된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2020년 노사나불상 내부에서는 20장의 책 형태로 엮은 방대한 분량의 「시주질(施主秩, 시주자 명단)」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에는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1635년 조성돼 대웅전에 봉안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관련된 수많은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 그 가운데 화엄사 중건을 지휘했던 벽암 각성(覺性)이 등장해 더욱 이목을 끌었다.


각성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맡아 남한산성 축조시 승군의 총 책임자였던 인물로 화엄사 외에도 법주사, 해인사, 쌍계사, 완주 송광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찰의 중건 불사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화려한 행적은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중흥기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엄사 중창주로서 대웅전 불상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한편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조성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로는 부처의 형상을 만들며 수행했던 승려 장인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당대 유명했던 청헌(淸軒), 응원 (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한 이들의 제자들이다. 이들 승려 장인은 모두 18명으로 각자 공력을 보태어 네모진 얼굴에 건장한 체구는 물론이고 간결한 옷주름, 근엄한 표정을 갖춘 당대 최고의 불상을 조성했다. 얼굴과 옷주름을 자세히 보면 노사나불이 다른 불상에 비해 부드러운 조형미를 자아내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간결하면서도 꾸밈없는 조선후기 불상의 명작인 화엄사 대웅전 불상을 탄생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한마음, 한뜻으로 불상 조성에 참여한 1,320여 명의 시주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는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 이광(李珖), 사위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등 왕실 인물이 등장하며 왕실 궁인들의 후원과 참여는 당시 불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수많은 인물의 마음과 공덕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진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기록을 통한 명료한 내력, 장중한 위엄을 내재한 예술성 등이 종합되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유일한 국보의 품격을 갖추었다.


4월, 연둣빛 잎사귀와 갖가지 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지리산의 봄날을 향유하며 화엄사 대웅전을 방문해 보자. 근엄한 표정으로 매력적이고 독자적인 조선의 미,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만나 대립과 경쟁을 멈추고 조화로운 화엄의 세상을 함께 꿈꾸길 바란다.




글, 사진. 김광희(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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