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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같음이 만든 다름
작성일
2017-05-0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553

나무 본래의 결을 찾아 -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나무의 결을 살려 조형미와 실용성을 갖춘 목가구를 만드는 소목장. 소목장은 창호나 장롱, 궤, 책상, 문갑 등을 제작했다. 조선 전기까지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한 가구를 담당했으나 후기에 이르러 민간에도 목가구가 널리 보급되면서 자급자족의 형태를 갖게 됐다. 주로 느티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물푸레나무, 소나무 등 결이 아름다운 나무가 목가구의 주재료로 쓰였다. 수종이 다양한 만큼 장인의 손에서 탄생하는 전통 목가구는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전통적인 목가구가 되기 위한 나무의 여정은 험난하다. 나무의 기본 수령은 300~500년은 돼야 하고, 어렵사리 나무를 구했다 해도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변형을 막기 위해 기름 혹은 풀을 발라 2년간 숙성시켜야 한다. 그 후에도 약 5년간은 그대로 두어야 재료로서의 자격을 갖춘다. 인내로 얻어낸 최고의 목재를 가지고, 소목장은 이음과 짜임의 기법을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견고하게 만든다. 쇠못 하나 사용하지 않겠다는 장인의 집념은 한 치의 어긋남도 불허하며 결구의 치밀함을 높인다. 나무가 지닌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생활 속 목가구로 스밀 수 있도록 지금껏 자리를 지켜온 소목장의 전통공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있다.

 
 
 

귀하디귀한 선비의 악기 -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

거문고는 깊고 웅장한 음색이 모든 악기를 거느릴만하다 해서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불렸다. 음악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거문고의 둥근 앞면은 하늘을 형상화하고, 평평한 뒷면은 땅을 가리키며, 현에서 흘러나오는 다섯음인 궁·상·각·치·우는 오행과 맞물려 있다. 천지조화를 상징하는 남다른 자태 덕분에 거문고를 향한 선비들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과 같은 거문고는 대를 이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거문고와 같은 크기의 악기를 제작할 수 있는 나무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옥동금은 성호 이익의 셋째 형인 옥동 이서가 금강산 만폭동의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얻어와, 그것으로 만들어 연주했던 거문고이다. 제작시기와 사용자가 정확하고 보존도 잘 되어 있어 18세기 초 우리 전통 악기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거문고와 옥동금은 크기와 형태가 다소 다르기 때문에 옛 악기와 음악을 복원하는데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뒤 판에는 이서의 글자와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가 쓴 시가 함께 새겨져 있어 거문고의 품격과 예스러움을 더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지혜 - 국가민속문화재 제33호 삼척 신리 너와집과 민속유물

강원도 산골에 접어들면 기와 대신 투박하게 얹어 놓은 나무 지붕의 너와집이 눈에 띈다. 집안에 들어서서 올려다보면 숭숭 뚫려 있는 구멍 사이로 하늘빛이 새어 들어온다. 눈이나 비가 오면 햇살 대신 물벼락이 떨어질 것 같지만 너와 지붕은 자연과의 공생을 보여주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습기가 있으면 나무가 차분히 가라앉아 샐 염려가 없고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어 습도도 적당하게 유지된다. 또한 산간마을이다 보니 나무만큼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도 없었을 것이다.

태백 산지나 개마고원 일대, 울릉도 등에 분포돼 있던 너와집은 오늘날 거의 사라지고 강원도 삼척 일대에 일부가 남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삼척 신리 너와집과 민속유물은 강봉문·김진호·윤영원 씨의 소유였던 너와집과 이곳에 남아 있는 민속유물을 가리킨다. 이 너와집은 굵은 소나무를 알맞게 잘라 지붕으로 얹었으며, 삼각형의 까치구멍을 내어 집안의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안방에는 불을 피움으로써 난방과 조명의 역할을 했던 시설(코클)을 배치해 추위에 대비했다. 그 외에도 눈이 쌓였을 때 짚신 위에 신었던 설피와 물건을 나르는 데 썼던 주루막 등이 함께 남아 있다.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표현 - 보물 제1254호 장흥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사찰 입구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의 웅장한 자태에 저절로 발길이 멈춰진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천왕상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천왕이 각기 다른 상징물을 손에 들고, 발아래에는 악귀를 밟는 모습을 갖게 됐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선도해서 보여주는 조각이 바로 장흥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이다.

나무가 가진 부드러움으로 사천왕상의 몸짓과 표정은 섬세하게 살아났다.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 이들은 각자의 개성을 뽐낸다. 동방 지국천왕은 분노한 표정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칼을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은 보관을 쓰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근엄한 표정과 당당한 자세로 칼을 들고 있다. 마지막 서방 광목천왕은 깃발을 잡고 소리를 지르는 듯한 위엄을 선보인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이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조각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크며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됐고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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