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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과 소통하는 시간의 향유
작성일
2021-01-2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200

하늘과 소통하는 시간의 향유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한 조선에서는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왕의 가장 중요한 책무의 하나로 삼았다. 하늘의 변화를 관찰하며 소통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때를 알려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책력을 발간하고, 시간을 알려주고, 일월식 예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책임을 다하고, 하늘이 내려준 권위를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했다. 즉 하늘과 겸허한 자세로 소통하며 그 안에서 일상의 평안을 추구한 것이다. 01.근엄한 문양을 담은 복원한 일성정시의 ⓒ문화재청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의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에 따르면, 다양한 천문기기와 시간측정기기를 의상구루(儀象晷漏)로 구분했다. ‘의(儀)’는 혼천의(渾天儀), 간의, 소간의 등 하늘의 형상을 측정할 수 있는 관측기기를 말하며, ‘상(象)’은 혼상(渾象), 천문도 등 하늘의 형상을 살필 수 있는 기구를 지칭한다.


‘구(晷)’는 앙부일구(仰釜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등 태양의 규칙적 운동을 이용한 해시계를 말하여, ‘루(漏)’는 보루각루(報漏閣漏), 흠경각루(欽敬閣漏) 등의 물시계를 나타낸다. 여기서 의상구루는 ‘의기(儀器)’로도 불리우며, 하늘을 측정하고 소통하며 이해하는 표준화된(법식과 같은) 도구로 여겼다.

02.천문대 역할을 한 서울 관상감 관천대 ⓒ문화재청 03.보물 제845호 앙부일구 ⓒ문화재청 04.창덕궁 어수당(魚水堂)을 배경으로 한 그림에 등장한 백각환 ⓒ국립중앙박물관

백성을 위한 공중용 해시계, 앙부일구

『세종실록』에 따르면, 앙부일구는 1434년(세종 16) 처음 개발됐다. 김돈(金墩, 1385~1440)의 앙부일구명(仰釜日晷銘)에는 “밤에는 경루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청동을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솥과 같다”고 앙부일구의 제작 동기 등이 나와 있다. 세종은 누구나 시간을 향유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惠政橋) 옆에 앙부일구를 설치했고,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12시진(時辰) 한자 대신에 동물 그림을 그렸다. 태양 운행을 기반으로 관측하는 앙부일구는 시간측정은 물론이고, 오늘날 양력 달력에 해당하는 24기(氣)를 알 수 있었다. 하늘과 소통하는 앙부일구 사용은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옛 궁궐의 그림에는 일영대(日影臺, 해시계 설치대)와 금루(禁漏, 물시계)터, 백각환(百刻環, 100각이 새겨진 시반면 해시계)이 나온다. 서궐도안(西闕圖案, 보물 제1534호)과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에 그려진 일성정시의 일영대와 금루(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창덕궁 어수당(魚水堂)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에는 1728년 왕이 함께 소통하며 회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는 이조판서 윤순(尹淳, 1680~1741)과 병조판서 조문영(趙文命, 1680~1732) 등 총 17명의 관리와 함께 모여 인사평가를 하고 있다.

05.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천문도 ⓒ국립민속박물관 06.국보 제230호 혼천의 및 혼천시계 ⓒ문화재청

하늘의 원리를 탐구하는 혼천시계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천체의 운행 원리를 탐구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현재 국보 제230호로 지정된 혼천의 및 혼천시계는 조선의 전통적인 혼천의와 서양의 자명종 동력을 결합한 것이다. 이는 세계과학기술사 학계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조선에서는 수력이 주요한 동력 방식이었지만, 관상감의 송이영(宋以頴, 1619~?)은 서양의 새로운 방식을 과감하게 적용한 것이다. 혼천의를 자동으로 운행하는 것은 이미 세종 대에 혼의와 혼상을 제작 운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천구상에서 1년 동안 태양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이해하기 위해 위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제작한 혼의는 대략 1.8m(지평환 지름), 혼상은 대략 0.7m(구 지름) 규모로, 수차와 나란히 있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즉, 북송대(北宋代) 수운의상대의 의상부분과 수차제어 시스템을 보다 집중적으로 개량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주야기륜과 물시계는 보루각루로 새로운 방식으로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구슬 신호 작동방식이 시보시스템에 적용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없는 방식이었다. 이후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임금을 위한 시계인 흠경각루가 제작(1438년) 운영되었다.


조선 초기 장영실은 두 개의 자동제어 물시계를 제작했는데, 이러한 기술이 수격식 혼의・혼상(1435년경)에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중기인 1669년(현종 10)에 이민철과 송이영은 각각 전통 방식의 혼천시계와 서양식 동력의 혼천시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2007년 1만 원권 지폐에 디자인으로 적용되면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송이영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연안송씨세보(延安宋氏世譜)』에 따르면, 송이영은 송정수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6월 10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음사로 관직에 나갔다. 송이영은 영의정 정태화의 천거로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가 된 이래로 관직 생활의 삼분의 일을 천문학겸교수로 보냈다.


송이영의 천문활동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혜성 출현에 따른 관측자로서의 역량, 둘째, 새로운 추동력 혼천시계를 개발한 기기 제작자로서의 면모, 셋째, 시헌력(時憲曆)의 시행과 대응을 통해 본 천문역법 전문가로서의 활동이다.

07,08.보물 제852호 휴대용 앙부일구와 밑면에 동치신미맹하한진산강건제(同治辛未孟夏下瀚晉山姜湕製)라고 적어 진산강씨 강건이 제작했음을 밝혔다. ⓒ문화재청

조선 후기 천문시계와 해시계 제작

자동화된 혼천시계의 제작은 조선 후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개인 천문대인 농수각에서 재현된다. 수격 방식으로 운영된 혼상의(渾象儀)와 서양 자명종을 동력으로 구동하는 혼천의가 제작되었다. 홍대용은 이 혼천시계 시스템을 통천의(統天儀)로 불렀다(『담헌서(湛軒書)』). 또 다른 혼천시계의 제작은 19세기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도 언급된다.


순조(純祖, 1790~1834)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 후에 문조로 추존, 1809~1830)가 재저시, 강이중, 강이오에게 자명종이 결합된 선기옥형을 만들게 하였다. 이때 만든 것이 시각이 정확하여 서양인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이어지는 혼천시계의 제작은 자동화를 통한 천체운행의 원리를 탐구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당시의 과학기술자,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의 발현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국가 운영에서 매우 중요했다. 조선 후기에는 그러한 통제가 민간 부분의 학문적 호기심과 탐구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홍대용이나 그와 함께 자명종을 제작했던 나경적이 행한 개인 천문대 건립은 조선 전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의 시간 측정, 이것은 휴대가 가능한 해시계의 출현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보물 제852호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를 통해 당시 성행했던 서양식 휴대용 해시계 플랫폼을 응용시켜 적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사회에서 시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가문이 생겨났다.


한성판윤(漢城判尹, 현재 서울시장)을 지낸 형 강윤(姜潤, 1830~1898)과 동생 강건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는 상아와 같은 고급 재료로 만들었다. 두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19세기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건의 두 아들도 가업을 이어 해시계 제작을 했다. 중인 출신의 기술자가 아닌 명문가의 3대가 조선 후기 해시계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선 후기 서민들은 소형의 막대해시계를 지니고 다녔다. 조선 초기에 사용한 규표(圭表)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해시계는 양천척(量天尺)이라고 불렀다. 작은 막대에 계절마다 길이가 다른 영침(표)을 동절기와 하절기로 구분하여 꼽고, 시간을 측정했다. 나무, 도자기 등의 재질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비교적 제작이 쉽고 휴대하기 간편하여 대중적인 해시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활용적 측면에서 쌍방 또는 다양한 사람들이 동일한 규격의 양천척을 지니고 다니면 상업활동에 매우 유용했다.


조선 초기부터 국가에서 추진한 천문의기 제작사업은 혼천시계류의 자동제어 방식으로 집중되었고, 조선 중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후 민간의 영역에서 자명종을 비롯한 천문시계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기술자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홍대용의 통천의 제작과정에서 만난 나경적, 안처인, 염영서가 있었고, 19세기 시계 제작으로 유명한 진산강씨 가문이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 시간을 관리하는 국가의 기능은 유지하되, 시계 제작의 다양한 활동과 사용으로 개인의 삶은 시간을 매개로 하는 소통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렇듯 선조들은 닿지 않는 세계, 천문과 겸허히 소통하며 더 나은 삶으로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글. 김상혁(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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