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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뜨락에 스민 선조들의 삶 한국의 전통정원을 찾아서
작성일
2007-09-0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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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남終南에 별장을 하나 가지고 있다. 별장의 남쪽 담 밖의 돌 틈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가둔 뒤에 연꽃을 심고 연못 가운데에 괴이하게 생긴 돌을 쌓아서 산 모양을 만들었다. 다시 그 돌 틈 사이사이에 소나무, 화양목 등 작게 생긴 놈만 골라 심었다. (중략) 괴이한 돌과 소나무, 잣나무 사이로 물이 흘러서 두어 자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며 맑은 기운이 푸른 산봉우리에 비쳐 밤낮 없이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으니 노는 데에도 즐거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요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베개를 베고 누워 있으면 쏴아 하고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마치 요란한 관현악기 소리 같아서 귀를 즐겁게 한다.’      
- 채수의 <나재집>에 실린 ‘석가산폭포기’ 中 -

위 글은 조선 예종 때의 문신이었던 채수라는 사람이 그의 저서 ‘나재집’에 실은 <석가산폭포기>의 일부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과정과 그 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적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유난히 자연을 사랑했던 것 같다. 정원을 만들고 조경을 가꾸어 자연과 가까이 하려 한 것은 신분과 계급을 떠나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모양이다. 왕가의 공간이었던 궁궐정원은 두 말할 나위 없고, 서원이나 민가, 별서, 하다 못해 유배지에서까지 그들은 정자와 정원을 가꾸며 자연에 관한 시를 읊조리고 문장을 쓰며 이를 즐겼다.
 보길도에 자신의 유토피아를 만들었던 윤선도나, 유배지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세상 시름을 달랬던 정약용, 수많은 원림정자와 정원을 만들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던 담양의 선비들을 떠올리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연주의자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정자들을 들를 때마다 시멘트·콘크리트·아스팔트 더미에 묻혀 살아가는 이즈음의 사람은 한없이 부럽고 또 부러울 따름이다. 선조들의 정서와 향취가 배어 있는 정원들을 들러 본다.


선비의 숨결을 느끼다  초간정과 독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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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궁면 죽림리는 예천 권씨가 오래 전부터 터를 닦고 자리를 잡아 온 곳이다. 이곳에는 초간 권문해(1534~1591)의 오래된 종택과 그의 별서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권문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한 사람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권문해는 49세 되던 1582년, 자택에서 가까운 금곡천변에 초간정을 지었다. 종택에서 초간정으로 가는 길은 지금은 천을 따라 난 찻길을 따르며 돌아가야 하지만 예전에는 종택 뒤편의 오솔길을 따라 오고 갔다고 한다. 종택과 별서 사이의 오솔길을 거닐며 사색을 즐겼을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초간정은 원래 작은 초가집의 형태로 지어 초간정사라 이름 붙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다시 세웠고 또 다시 병자호란을 맞아 무너지자 권문해의 후손이 다시 세우는 등 여러 차례 재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7세기에 세웠을 때에는 석조헌, 화수헌, 백승각 등의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대개 무너져 1870년에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었지만 초간정의 운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울창한 송림과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는 금곡천이 정자와 어우러져 자연 속에 안주하기를 원했던 조선선비의 성향을 느낄 수 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자리한 독락당(보물 제413호)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인 회재 이언적의 별서이다. 그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25)에 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독락당을 지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그의 나이 42세가 되던 해(1532). 재미있는 것은 소쇄원이나 다산초당, 보길도의 세연정 등이 모두 격변이나 사화, 혹은 세상에 염증을 느낀 선비들의 안식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세상과 격리되어 자신만의 공간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독락당도 그런 연유에서 지어진 건물이었다. 건축학자들은 독락당의 건축적 정면을 동쪽 계곡 쪽이라 한다. 다시 말해, 동쪽 자연을 향해 열려진 정면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 사회와의 절연과 자연을 벗 삼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독락당에 들어서면 외부의 시선이 차단되어 보이나, 사랑대청에 서면 시냇물이 흐르는 풍광을 볼 수 있도록 동쪽 담에 살창을 뚫어 놓았다. 독락당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려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독락당은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일반양식과 달리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살이의 특이한 평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심포를 써서 정갈한 멋을 더했다. 정면에는 퇴계의 친필인 옥산정사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독락당 현판은 이산해가 썼다.


최초의 인공 정원  궁남지와
통일신라의 정원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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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오면서 보이는 단아한 자태, 자욱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모습,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 숲길이 마음을 한층 평온하게 한다. 풀 냄새, 물 냄새, 흙냄새,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 500여 미터 가량의 연못 둘레는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궁남지, 이곳은 왕가의 정원이었다. 패도의 한이 서린, 그래서 당시보다는 많이 초라해진 모습이지만 이른 아침의 궁남지를 거닐다 보면 어디선가 왕가의 자분자분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은 작은 연못과 정자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인공 정원이다. 경주의 안압지보다 40여 년 정도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궁남지와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백제 무왕 35년(634)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무왕 39년(638)에는 "3월에 왕과 왕비는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당시에는 규모가 지금보다 꽤 넓었던 모양이다. 연못 주위에서 건물의 주춧돌과 기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주변에 또 다른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어쩌면 왕의 별궁이었으리라는 얘기까지 전해져 온다.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안압지는 궁남지와는 전혀 다른 운명으로 만들어졌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직후인 674년, 신라는 승전국으로 누리게 된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그 위용에 걸맞은 새로운 궁궐을 만들게 된다. 궐 안에는 각각의 길이가 200여 미터에 달하는 연못을 만들었으며 주변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의 안압지이다. 못은 전체 길이가 가로 세로 각각 190미터의 장방형 평면으로 면적이 1만 5658 평방 미터에 이른다. 못의 둘레는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쌓았으며 곡선과 직선을 섞어 창의적인 형태로 만들었다. 어느 곳에서 보느냐에 따라 못의 크기와 형태가 달리 보이도록 한 것이다. 못 속에는 삼신도를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조성했으며, 못 주위로 12개의 둔덕을 만들어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하게 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궁 안 못에 가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야말로 최대한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한 정원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신라가 망한 935년 이후 궁은 폐허가 되었고 안압지 또한 역사의 뒤편으로 한참 동안 물러서 있게 되었다. 현재의 안압지는 새로이 개보수를 거치고 은은한 조명 시설을 설치해 고도 경주의 밤을 밝히는 유적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민초들도 애용했던 관루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배경 무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춘향의 로맨스와는 별개로 이곳은 한국식 전통정원의 운치를 가장 잘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누원樓苑의 개념은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유적 기능의 장소이다. 아무나 와서 쉬고 아무나 와서 즐길 수 있는 공원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삼척의 죽서루, 밀양의 영남루, 안동의 영호루, 평양의 부벽루가 강가나 호숫가에 자리해 자연을 조망하는 기능을 지닌 데 비해, 광한루원은 남원 시내를 흐르는 맑은 요천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조원이다. 이러한 광한루원은 15세기에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누각인 광한루를 중심으로 누 앞에 2000여 평의 연못을 파고 연못 안에 봉래섬, 방장섬, 영주각 등 세 개의 섬을 조성해 삼신도를 접목시켰다. 연못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것이고 삼신산은 신선이 사는 곳인데, 곧 월궁 속의 광한루와 함께 광한루원 전체가 선경이 되는 것이다. 광한루는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月宮의 이름인 ‘광한전’에서 따온 것으로 전라감사였던 정인지가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가 바로 이 곳이구나” 라고 감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대나무, 왕버들을 심어 수림이 울창하고, 못에 비친 나무들의 물그림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오작교가 또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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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정우 
사진 : coreein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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