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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주관광개발계획이 키운 고고학도
작성일
2017-07-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869

경주관광개발계획이 키운 고고학도 - 숭실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최병현 1970년대 천마총 발굴을 시작으로 고고학에 발을 디딘 최병현 교수는 황남대총 남·북분과 안압지, 황룡사지 등 한 국 현대 고고학의 중요한 현장을 어김없이 지킨 인물이다. 모교 숭실대에서 정년 퇴임을 한 그는 자신만의 연구실에서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인 창산 김정기 박사의유 작을 정리하고 있다.  (좌)1973년 천마총 천마도를 수습하는 최병현(왼쪽). 가운데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소성옥, 오른쪽이 윤근일 선생. (우)최병현 선생

경주에서 시작한 우연, 고고학 인생을 열다

지난 5월 12일, 춘천 중도 발굴현장에서는 문화재청이 주최한 전문가 검토회의와 발굴단들이 자체 주최한 자문회의가 연이어 있었다. 꽤 무더웠던 이 날,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나타난 최병현 선생은 도맡아 키우고 있는 손주 자랑을 위해 휴대 전화 속 사진부터 늘어놓는다. 밤에는 육아 때문에 시간이 안 난다는 그를 만나러 평촌 연구실로 향했다.

2013년 숭실대 교수직을 정년으로 퇴임하면서 이곳에 연구실을 낸 최병현 선생. 손주에게 해방되는 낮에 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요새는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인 창산 김정기 박사 유작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얼마 전 유작집 첫 권이 나왔으니 그 후속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내친김에 최 선생은 ‘창산평전’도 쓰고 싶단다. 눈치를 보니 상당한 자료를 수집한 듯했다. 창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만큼 그가 김정기 박사로부터 받은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1967년 숭실대 사학과에 들어가 1972년에 졸업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고고학과는 전연 인연이 없었던 최 선생. 그러다가 1971년 박정희 정부가 공표하고 이듬해 추진하기 시작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유적 발굴이 포함되고, 그 목적으로 천마총 발굴이 시작되면서 그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는다.

“당시도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했어. 학교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빈둥거리고 있는데, 스승인 故 임병태 교수님이 부르는 거야. 경주에 발굴이 있는데 거기 갈 거냐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선생님 추천으로 이력서 써서 문화재관리국을 찾아가 김정기 (문화재연구)실장님을 뵌 거야. 그때가 1972년 3월 19일이지. 그리고는 이튿날 경주로 내려갔어. 근데 말이야, 경주 방문은 대학생 때 춘계답사로 한 번 가 본 게 전부였어.”

이를 계기로 그의 경주 생활과 고고학 인생이 시작됐다.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남·북분을 팠고, 안압지를 거쳐 황룡사지까지 조사했으니, 한국 현대 고고학의 굵직한 현장에는 그가 빠짐없이 있었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건지고, 천마도를 수습했으며, 그 큰 황남대총도 끝까지 발굴했다. 황룡사지 발굴은 단장과 부단장이 있었지만, 현장 감독은 최 선생이었다.


발굴 현장을 떠나 고고학을 가르치는 교단에 서다

그렇다면 그는 분신과도 같은 문화재연구소, 그리고 그토록 존경하던 창산을 왜 떠났을까?

“1983년 1월쯤으로 기억해. 연세대 사학과 출신인 한남대 오해진 교수에게서 연락이 온 거야. 박물관 문을 열었는데, 고고학 교수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 그 전에 오 교수님이 숭실대 교수님들께 내 얘기를 들으셨다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는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좀 달라 했어. 창산 선생께 말씀을 드렸지. 창산은 그 전에는 학교에 자리가 나면 다 내보냈거든. 근데 ‘너는 안되겠다’ 하시는 거야. 황남대총 보고서도 안 나왔고, 황룡사도 한창 발굴 중인데 곤란하다고.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나? 실장들과 논의를 해서 나를 보내기로 했다며 말씀하시더라고. 창산 선생이 안 보내줬으면 난 학교 못 갔어.”

이렇게 해서 198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을 떠나 한남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96년에 모교 사학과로 다시 옮겼다. 그가 비운 황룡사 발굴 현장 책임은 신창수 선생에게 넘어갔고, 한남대 후임은 구석기 전공인 연세대 출신 한창균 선생이 채웠다. 관리국을 떠날 당시 그는 학예연구사였다. 왜 연구관으로 진급하지 못했느냐 물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떠나기 1년 전에 연구관 심사가 있었는데 나는 미끄러졌어. 당시 문화재관리국 시절인데 (소속 기관인) 문화재연구소에는 연구관 정원(TO)이 없었거든. 그때는 국립박물관에서 데려가면서 연구관으로 승진을 시켜주곤 했어. 연구소에서는 나하고 박영복 씨가 대상이었지. 결국, 연구소에서는 박영복 씨가 박물관으로 갔어. 당시 연구관 승진 대상자가 6명이었고, 면접시험만으로 4명을 선발했는데 이건무·이강승·한영희·박영복 씨가 되고, 나하고 김삼대자 선생 둘이 떨어진 거야.”

국립중앙박물관이 매년 시상하는 동원학술상이 있다. 보통 수상자는 국립박물관 직원이거나 그 출신인데 1981년 초대 수상자는 뜻밖에도 선생이다. 어찌 된 일일까?

“1981년에 내가 석사 논문을 모교에 제출했어. 임병태 선생님이 심사위원장을 삼불 김원룡 선생께 부탁한 거지. 논문 주제가 신라 적석목곽분이었는데, 그걸 삼불 선생이 그리 좋다고 가는 데마다 칭찬하신 거야. 동원학술상도 삼불이 밀어서 된 거고. 그 내막을 어찌 알았느냐? 집사람이 소성옥이잖아? 천마도 수습하는 사진에서 천마도 같이 들고 있는 그 여자가 나중에 내 마누라고, (이화여대) 진홍섭 선생 제자잖아. 진홍섭 선생이 동원학술상 이사야. 그분이 집사람한테 얘기해서 알았어.”

젊은 시절 우연한 계기로 고고학에 발을 들인 최병현 선생은 역사적인 ‘천마총 발굴’ 현장을 지켰으며 수십 년 동안 교단에서 고고학의 가치를 알려왔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역사의 한 흐름에서 식지 않는 열정으로 연구에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다.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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