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 작성일
- 2006-09-06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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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다시 찾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지난 7월 14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93년 만에 환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의 주요 국정의 내용을 거의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방대한 사실기록이다. 역대 왕의 실록은 반드시 재임했던 왕의 사후에야 편찬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왕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후대에 남은 실록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록편찬은 상세한 국정사실의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것 이외에도 왕이 재임 시에 소임을 다하도록 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실록은 영구보전을 위하여 여러 부를 인출印出하고 전국 각도의 천재지변을 피할 만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 사고를 짓고 분산 보관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모두 불타고 오로지 전주사고에 보관했던 실록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두 사람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기 때문에 전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 임금 대에 들어 이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다시 4부를 새로 인출하여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 등 전국 5대 사고에 보관하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보존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제에 강탈되었다. 역사연구의 미명하에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3년에 오대산 사고본은 관동대지진의 화재로 대부분 망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모두 787책이었으며 그 중 지진화재의 참화를 면한 것은 오직 74책뿐이었는데 이 책들은 당시 개인에게 대출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 74책 중에서 27책은 곧 회수되었으나 도서관이 불탔으므로 둘 곳이 없어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고 뒤늦게 회수된 나머지 47책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의 땅에서 남아 있다가 이제야 고국으로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대산 사고본 환수의 의미
조선왕조실록 중 ‘오대산 사고본’의 환수는 여타 조선왕조실록과는 다른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왜 오대산 사고본 환수에 대해 유독 특별하게 반응하는지, 왜 오대산 사고본이 중요한지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여타의 사고본과 다른 점이 있다. 즉 오대산 사고본 중 선조임금 이전의 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실록을 재간할 때 틀린 글자, 빠진 글자, 문장 등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이른바 교정본 실록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실록의 백데이터였던 셈이다. 실로 조선왕실에서 정부문서 기록보존을 위하여 여러 부의 복사본은 물론 그 이전의 백데이터까지도 소중히 갈무리하였다는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여타의 실록과 다른 편찬 의의를 지니고 있다. 즉 오대산 사고본은 실록의 교정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과거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문서보존을 할 수 있는 현재의 과학만능의 시대의 우리보다도 훨씬 투철하였던 선조의 기록보존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