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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 한 남한산성
작성일
2006-09-0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10

■문화유산 둘러보기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 한 남한산성

삼국시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병자호란의 비극이 물든 남한산성은 오늘도 청량산을 에워싸며 한민족을 굽어보고 있다.

남한산성, 그 험난했던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을 찾는 날은 늘 이랬다. 2년 전 초겨울에 왔을 때 첫눈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내려 답사를 어렵게 하더니, 이번에는 소낙비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사무소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경치 좋은 길 위에 올라서면서부터 시작된 비는 남한산성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금방 계곡을 쓸고 내려갈 듯한 기세의 폭우가 되었다. 동문 문루 옆 천주교인들을 잡아다 처형시켰던 장소와 그들의 시신을 내가던 암문暗門인 시구문에도 비는 거세게 쏟아졌다. 그러나 사실 영상 35도는 족히 넘을 무더위를 씻어내 준 빗줄기라 고마운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의 임금과 군사들에게는 양식과 의복이 넉넉지 못했다. 군사들은 겨울비를 맞으며 무서운 추위와 배고픔, 수마睡魔에 시달리다 얼어 죽는 이가 속출했다. 역사의 상상은 허망하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조 대신 광해군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됐을까? 임진왜란 때 북방으로 허위허위 도망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서 남쪽의 분조分朝를 이끌며 의병과 군사를 모아 전투를 지휘했던 광해군. 백성을 위무하며 임진왜란을 종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따라서 당연히 백성의 신임을 듬뿍 얻었던 광해군이 왕위를 계속 지켰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성마을과 답사의 즐거움 이런 생각을 간직한 채 남한산성 내의 산성마을로 들어간다. 산성마을 안은 주로 각종 문화재와 음식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음식점은 토종닭과 오리 요리, 산채정식, 매운탕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맛집을 잘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음식점의 외형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도 맛있는 집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산성마을 어느 집에 가더라도 기대 이하의 맛으로 미식가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성안 문화재를 답사한 다음 토종닭찜이나 오리탕을 안주로 남한산성 소주 한잔을 기울여보라. ‘캬~!’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40도짜리 순곡 증류주-산성소주의 맛과 향기…. 남한산성에 온 이들은 반드시 이곳의 별미를 맛보고 가야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산성 내의 문화재보다 음식점 얘기가 먼저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말이야 바른말이지, 답사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식도락이 아닌가. 고대 군사적 요충지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남한산성 답사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주봉으로 하여 무려 11.76km에 달하는 산성으로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정밀 측량한 결과 전체 둘레가 12.335km임이 밝혀졌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는 남한산성이 원래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인 “백제 온조왕이 즉위 13년에 쌓고 남한산성이라고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지금도 남한산성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성 아래로 초기 백제의 몽촌토성과 한강 건너 고구려의 아차산성, 그리고 그 뒤로 북한산성이 거의 일직선상으로 있어 한눈에도 고대부터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성내에는 현절사와 행궁, 만해 기념관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북문에서 남문까지 성내의 유적과 시설물들을 대략 살펴봤으면 이제는 산성을 둘러볼 차례다. 산성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북문(전승문)을 통해 서쪽 성벽을 타고 답사해보길 권한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돼 있으며 또한 도립공원으로도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고색창연한 산성의 느낌도 웅대하지만 성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노송들과 단풍나무들이 주는 훌륭하고 멋스러운 경치 또한 오래도록 깊이 인상에 남는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은 걷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선사한다. 북문에서 서쪽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은 호젓한 산책길로, 북장대 터 오르는 구간에 약간의 경사가 있으나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북장대 터를 지나면 암문이 나오고 연주봉 옹성이 북쪽 능선을 따라 축성돼 있다. 다시 성벽을 따라가면 산성의 우익문인 서문이 나오고, 더 가면 남한산성의 주산인 청량산 정상에 도착한다. 여기에 남한산성의 상징인 수어장대와 청량당, 매바위가 있다. 수어장대는 서장대라고도 불리는데, 인조 2년(1624)에 단층으로 지은 것을 영조 27년(1751), 그 위에 누각을 짓고 외부 편액을 수어장대, 내부 편액을 무망루無忘樓라고 썼다. 서장대에서 길을 재촉해 남문(지화문)으로 내려온다. 남문을 나가면 성남 쪽으로 빠지는 도로가 여행자를 기다린다. 여행자 대부분은 여기까지만 보고 성을 빠져나간다.

남옹성과 여러 외성들 하지만, 남한산성의 진면목은 이제부터다. 남문에서 약간 급한 경사이긴 하지만 조금만 오르면 제1남옹성이 나타난다. 옹성은 억새과 잡초에 가려 있어 멀리서 보면 그냥 길게 뻗은 작은 능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1옹성 암문을 통해 내려가서 관찰해보면, 전략적으로 아주 우수한 방어시설임을 알게 된다. 또 그 옆에 있는 제2옹성 역시 왜 남한산성이 그동안 한 번도 적에 의해 함락된 적이 없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인가를 깨닫게 된다. 본성을 지키기 위해 그 옹성에 들어간 군사들은 이미 자신의 생명을 국가와 백성, 그리고 임금을 위해 내놓았음을 보는 이는 깨닫게 될 것이다. 산성을 답사하는 분들은 반드시 남옹성에 들어가 선조의 비장한 호국의지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만약 그대가 남한산성에 와서 이런 시설들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그냥 간다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

남한산성의 또 다른 우수성은 동쪽에 축성된 외성들, 즉 한봉성과 봉암성에 있다. 외성은 내성을 호위하는 시설로서 동장대 터에서 벌봉, 한봉까지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해 쌓았다. 보통 남한산성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성안마을과 북문, 서문, 수어장대, 남문 정도만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가듯 보고 갈 뿐이다. 남한산성은 절대로 아픔만을 간직한 성이 아니다. 초기 백제 온조왕이 머물던 역사의 현장이자 이후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패권을 얻기 위한 군사요충지였다.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속해 있었으며 사방이 급한 경사면으로 둘러싸인 산에 축성한 남한산성은 아주 빼어난 방어시설이었던 것이다. 민족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한산성에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다시 여름 햇살과 매미 소리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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