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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 다시보기(연천·파주편)
작성일
2006-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929



역사 속의 파주 파주지역의 임진강과 지금의 연천漣川지역인 한탄강 유역은 주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곳이다. 또한, 적성면積城面 율포리栗浦里, 파평면坡平面 장파리長坡里와 금파리金坡里 유적 등에서도 선사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한반도 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에 파주를 제일 먼저 차지한 국가는 백제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346년~375년) 시기에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 392년에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이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이 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이게 되다가 결국 475년에 이르러 현재 파주지역 전체가 고구려 영토로 귀속되었다. 삼국 중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뒤늦게 한강유역을 둘러싼 다툼에 뛰어들어 진흥왕眞興王대(540년~576년)에 백제와 연합, 고구려세력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낸 후 다시 백제마저 축출하여 파주는 신라의 관할에 들어간다. 이후 신라와 고구려는 적성積城지역을 중심으로 대립하지만, 세력이 강화된 신라의 패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현재의 칠중성七重城은 삼국통일 과정의 주요 무대로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향해 출발한 곳, 역시 칠중성이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장단長湍, 적성積城, 파평坡枰지역이 기현畿縣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종 초에는 양광도에 속해 있었다. 문종 16년(1062년) 개성부가 신설되면서 장단현이 소속되었고, 이듬해에 파평현, 적성현, 봉성현이 개성부에 이속되었다. 의종대에는 산과 강의 경치가 뛰어났던 이곳에서 왕과 문신들이 자주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보현원普賢院이 바로 장단지역의 조현역調絃驛 북쪽이다. 명종 4년(1174년)에는 봉성현을 서원현으로 개칭하고 감무를 두었다. 조선 건국 후 태조 2년(1393년)에 이 지역은 주민들의 진정에 의해 군으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교하군交河郡이 현으로 강등, 한양에 소속되기도 했다. 파주라는 명칭은 1459년, 당시 원평도호부原平都護府가 자성왕비慈聖王妃(정희왕후)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이름을 파주坡州라 고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 파천하면서 이 지역을 방어선으로 삼게 했으나, 결국 파죽지세의 왜군에게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도원수 권율權慄과 순변사 이빈李殯이 파주 읍치邑治의 진산鎭山을 지켜 왜적이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르면 지세가 노쇠해진 한양을 버리고 파주의 교하로 수도를 옮기자는 교하천도론이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광해군은 천도를 포기하게 되고, 이후 1899년(광무 3년)에 파주군은 12면 141리, 적성군이 4면 47리, 교하군이 8면 27리, 장단군이 20면 63리의 행정구역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구한말 이 지역에서는 반봉건·반외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역둔토驛屯土 농민農民의 항조운동抗租運動과 활빈당活貧黨 활동, 그리고 항일 의병운동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과 4월에 걸쳐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작업이 실시되어 적성군이 연천군에 흡수되고 교하군 전역이 파주군에 폐합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조직적이고도 치열한 양상을 보여 1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피검되었으며, 중앙민족대표와의 연계나 특별한 결사조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민 대다수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해방 이후 심한 좌·우익 대립과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지만 그 해 10월 1일 미 해병대가 문산을 거쳐 임진강까지 진출하면서 파주는 완전 수복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 12월 31일 또다시 파주는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듬해 3월 이후부터 5개월간 여섯 차례에 걸쳐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진주하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이후 전선은 임진강 일대에서 교착되었고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파주를 둘러싼 쌍방의 공방전은 종식되었다. 파주를 빛낸 인물과 문화재 파주를 빛낸 역사적 인물로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해서 방촌 황희黃喜, 묵재 윤관尹瓘, 구암 허준許浚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 역시 풍부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2점과 사적 10점, 천연기념물 2점, 중요 무형문화재 1인, 등록문화재 4점, 전통사찰 4곳이 있다.

윤관장군묘 (사적 제323호) / 장릉 (사적 제196호)
<윤관장군묘 (사적 제323호) / 장릉 (사적 제196호)>
용미리 석불입상을 위시하여 보물 제1323호로 지정된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 묘역墓域 내 장명등長明燈, 덕은리 주거지 및 지석묘군이 있으며, 조선의 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묘인 장릉長陵, 공·순·영릉恭·順·永陵, 윤관장군의 묘, 오두산성烏頭山城, 후궁의 묘인 소령원昭寧園과 수길원綏吉園이 있다. 또한, 적성면의 가월리·주월리 구석기유적지가 있으며 칠중성七重城을 비롯하여 고려 전기의 국립 숙박시설인 혜음원지惠蔭院址와 교하읍 송촌리의 한강하류 재두루미 도래지가 천연기념물 제250호로 지정되었고 역시 천연기념물 제286호로 지정된 적성 물푸레나무가 15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궁시장弓矢匠 유영기씨가 전통 화살 장인의 맥을 잇고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시·도 지정문화재가 파주 구석구석에 숨어있어 풍부한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한반도 내의 시대적 세력판도를 그대로 보여준 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제국의 흥망성쇠와 영욕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땅, 파주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21세기에는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의 땅으로 거듭나야 할 역사적 소명을 띤 곳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글 _ 신춘범 파주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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