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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옛 음반, 유성기 음반 이야기
작성일
2012-04-1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391

 

말하는 기계, 나팔통으로 소리를 담다
[만고절창] 외부에서 일전에 유성기를 사서 각항 노래 곡조를 불러 유성기 속에다 넣고, 해부該部 대신 이하 제 관인이 춘경을 구경하랴고 삼청동 감은정에다 잔치를 배설하고, 서양 사람이 모든 기계를 운전하야 쓰는데, 먼저 명창 광대의 춘향가를 넣고, 그 다음에 기생 화용과 및 금랑 가사를 넣고, 말경에 진고개패 계집 산홍과 및 사나이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기관器管 되는 작은 기계를 바꾸어 꾸미면 먼저 넣었던 각항 곡조와 같이 그 속에서 완연히 나오는지라. 보고 듣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더라.
― 『독립신문』 1899. 4. 20.

이런 실린더 레코드를 들려주고 돈을 받는 ‘감상소’가 봉상시[서울역사박물관] 건너편 북물골, 증청방 주석동, 광통교 등지에서 성업을 했다. 실린더 형 레코드는 왁스蜜蠟로 만들어서 즉석에서 취입과 재생이 가능하지만, 재질이 연약해서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한국 최초의 음반, 태평양을 건너다
소리를 녹음한 평원반이 처음 발매된 것은 1907년 3월이었다. 이 음반은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취입을 하고, 원반을 배편으로 미국에 싣고 가서 음반으로 찍은 뒤 다시 한국(대한제국)으로 들여와 판매하였다. 이 때 취입한 것은 경기잡가 유산가, 양산도, 가사 황계사 등 모두 30종이며, 현재 9장이 발견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미국 빅타 레코드가 100여 곡의 음반을 취입하여 역시 원반을 미국으로 가져가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서울에서 취입했기 때문에 다양한 곡들이 녹음될 수 있었다. 취입자는 가객 김재호·이정서, 기생 향선·남수·벽도·채옥·옥도·향월·앵앵·채봉, 율객 박팔괘·오태선, 창부 신경연·송만갑, 기타 악공 등 약 30여 명에 이르지만, 현재 10여 종만 발견되었을 뿐 대부분 실물 음반들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에서 발매한 대한제국 시절의 음반은 한쪽 면만 녹음되어 있어서 ‘쪽판’이라고 하며, 녹음기사가 직접 외국의 현지까지 가서 녹음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런 것을 ‘출장녹음’이라고 한다. 이들 음반은 우리나라 초창기 녹음으로 희귀하기도 하지만, 명인명창들의 연주가 훌륭하고, 전통음악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우리나라 음반의 다양화 과정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음반의 발매 양상은 새롭게 변하였다. 일본에서는 1909년 5월부터 자체적으로 음반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11년 9월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조선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음반시장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예속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ROYAL RECORD, NIPPONOPHONE, SYMPHONY, 닙보노홍, 일축조선소리반 등 다양한 상표로 조선음보를 발매하였으며, 1911년부터 192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쪽판 103면, 양면반 310장 등 많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야마구치 가메노스케山口龜之助는 1912년 일축조선소리반을 취입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선 경성에서 나가시마永島逸太郞씨가 동경으로 인솔하였는데, 송만갑·박춘재·관기 등과 반주자·보조원들을 더하여 스무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때마침 그때는 꽃놀이의 계절이라서 그들은 벚꽃 만발한 에도江戶 관광을 기대하면서, 날마다 시바구치芝口 야마시로야山城屋에 진을 치고 2백매 분량의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일축은 처음에는 녹음 스튜디오가 있는 일본 동경에까지 가서 취입하였지만, 1925년 이후에는 서울에 간이 녹음실을 설치하여 원반을 일본에 가져가서 음반을 제작하였다. 서울 취입이 이루어진 뒤부터 더욱 많은 연주자가 참여하였고, 다양한 곡들이 음반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

일축 음반은 풍부한 악곡을 담고 있는데, 박춘재·김홍도의 경기소리, 심정순·송만갑·이동백·김창룡의 판소리, 백모란·길진홍·장금화·최섬홍·이진봉·손진홍의 경서도 소리 등 다양한 옛 소리를 접할 수 있다. 또한 ‘학도가’, ‘권학가’, ‘이 풍진 세상’ 같은 창가, 안기영의 ‘내 고향을 이별하고’, 홍난파의 ‘애수의 조선’ 등 초창기 양악도 취입되었다.

개화기에 유행하던 창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학도가’는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던 ‘철도창가’라는 곡에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 낙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棟梁 되네.’ 라는 계몽적인 노랫말을 붙여 각급 학교 창가 시간에 많이 불렀던 것이다.

유성기 음반, 죽음을 찬미하다
1925년 9월부터는 일동축음기 주식회사NITTO RECORD가 등장하여 ‘제비표 조선레코드’라는 상표로 한국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처음으로 이기세李基世라는 조선인이 음반 제작을 기획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연주자 선발과 선곡이 이루어졌다. 하규일·현매홍의 가곡, 최학봉·김화여·김창근·이응룡·김계선 등의 정악, 김창환·송만갑·김창룡·박월정·김녹주·박녹주의 판소리, 심상건의 가야금산조 등 중요한 녹음이 많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나 월남 이생재의 연설 ‘조선청년에게’ 등도 중요한 녹음이다. 일본에서는 유명인사들의 정치연설 같은 녹음이 많이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는 정치적 연설을 담기 어려웠고, 이상재의 이 계몽적인 연설 음반도 대부분 압수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Ivanovich의 ‘다뉴브 강 물결Danube Waves’이란 기악곡을 번안한 것으로,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라는 후렴구를 통해 식민지 젊은이들의 절망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1910년대 ‘학도가’ 식의 계몽주의를 지나, 3.1운동 이후 식민지 상황의 고착화로 인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문화 전반을 휩쓴 허무주의, 퇴폐주의 경향은 노래에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구나 이 노래를 취입한 윤심덕이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노래 역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각 신문에서는 대대적인 추적 보도와 함께 모방 자살을 우려하는 사설을 싣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이 음반은 최초로 대중적인 인기를 거둔 히트곡으로, 근대 대중음악, 대중문화의 시대를 알리는 음반이요, 음반의 대중매체적 속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음반이다. 또한 한국음악 유성기음반으로는 유일하게 장시간 녹음이라는 일동축음기의 신기술이 담겨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10인치 유성기음반은 보통 3분 30초가 녹음의 한계인데, 이 음반에는 무려 4분 40초가 담겨 있다.

 

전기녹음의 시작, 유성기 음반의 시대 꽃을 피우다
1928년부터 신기술로 전기녹음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음반은 나팔통으로 소리를 모으고, 음압으로 얇은 막을 진동시켜 밀랍 판에 소리골을 새긴 다음, 금속으로 도금하여 틀을 만들어서 끈적하게 녹인 셸락을 눌러 찍는 것이다. 음반을 만드는 방식은 같지만, 전기녹음은 마이크로폰으로 소리를 증폭시키기 때문에 더욱 크고 선명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이 기술로 인해 소리는 사실음에 가까워졌고, 비로소 감상할 만한 수준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음악 유성기 음반은 약 6,500종류 정도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전기녹음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전기녹음 음반이 나오고부터 음반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유성기 음반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문화 시대를 열어간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전기녹음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콜럼비아(일축), 빅타, 포리돌, 시에론, 오케, 태평 등 보통 6대 레코드사라고 부르는 음반사와 밀리온, 고라이, 돔보, 쇼지꾸 등에서도 소량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여러 회사에서는 매월 일정량씩 음반을 발매하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경쟁적으로 음반을 발매하였다. 유성기 음반에는 민요·판소리·창극·잡가 등 전통음악은 물론, 유행가(대중가요), 코미디 장르인 만담·난센스·스케치, 변사의 무성영화 설명, 신파극, 악극, 심지어 친일가요까지 당대의 모든 공연예술이 담겨 있다. 근대 공연예술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유성기 음반을 빼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겨레 정서의 원형을 전통음악 유성기 음반이 담고 있다면, 변화해 가는 시대적인 정서와 사회의 모습은 대중가요나 신파극 음반을 보면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유성기 음반은 민족적·시대적 정서의 보고인 것이다.

 

글·사진·배연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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