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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구촌 곳곳 우리 문화재를 찾아서
작성일
2006-04-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868

세계 속에서 만난 우리 문화재 12

화관 부녀자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는 관모이면서 미적 장식품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중국 복식과 함께 전래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궁중에서 사용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귀족과 양반계급의 부녀자 예복에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크기가 작아져 영·정조 때 내려진 가발 금지령에서 가체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얹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도록 한 후 궁중과 서민층에서 모두 쓰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와서 정장할 때는 족두리를 썼으며 화려하게 꾸민 활옷이나 당의를 입을 때는 화관을 썼다. 종이로 틀을 만들어 그 위에 흑색 비단을 붙이고 금종이를 오려 붙였으며, 전면 중앙에는 석웅황을 달고, 정수리에는 봉황 떨새를 중심으로 갖가지 구슬과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앞드림은 10줄의 옥구슬과 금전지술을 달아 화려함을 더하여 준다. 19세기~20세기 초 / 높이 19.1cm 머리둘레 51cm 『모스크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 수록 자료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문화재로 하나되는 남과 북 12

경성읍성 남문 북한 국보유적 제119호 함경북도 경성군 승암노동지구에 위치해 있는 경성읍성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남문루가 유일하다. 성문들은 1756년(영조 32년) 성문을 모두 홍예문을 가진 석축으로 바꿀 때 새로이 중건되었으며, 남문루는 1838년(헌종 4년)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수성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남문은 성벽을 조금 두텁고 높게 쌓은 가운데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중층 팔작집의 문루를 올렸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따로 두지는 않았지만, 홍예문의 양 측면 벽을 조금 돌출시키고 성문을 그 사이에 둠으로써 성문을 가리고 방어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또한 성벽이 자연석으로 쌓은 것에 비해 홍예문은 벽돌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하층부를 두고 상층부는 정면과 측면에서 각각 2칸씩 줄여 올라간 상층부를 둔 중층집이다. 전체적으로 경성읍성 남문은 구조적인 튼튼함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 현지의 요구와 조건에 어울리는 독특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는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성문루 가운데 현재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대문과 평양성의 대동문과 보통문, 그리고 국경도시인 경성읍성의 남문과 종성읍성의 수항루 등을 꼽을 수 있다. 자료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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