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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시풍속으로 엿보는 문화유산
작성일
2006-04-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872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봄에는 한식, 여름에는 단오, 가을에는 추석, 그리고 겨울에는 설을 만들어 명절을 쇠고 그것도 모자라 24절기를 만들어 예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갖가지 놀이를 즐기는 아름다운 전통의 풍습을 지켜왔다. 그 중에서도 한식寒食은 예로부터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농경사회 중심인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중요한 명절로 꼽혀왔는데, 조선후기 『동국세시기』 삼월조에는 한식에 대해 기술된 대목이 보인다.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이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이 기록에 미루어 예전에는 한식이 아주 큰 명절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본격적 봄의 시작인 한식은 절기상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로 양력으로는 청명 다음날 무렵인 4월 5일 즈음이 해당되며 음력으로 2월 또는 3월에 들기도 한다. 금연일禁烟日·숙식熟食·냉절冷節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식寒食이란 글자풀이 그대로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 하여 붙여졌다. 이 날에는 한식면寒食麵이라 하여 메밀국수를 해 먹거나 쑥단자, 쑥탕, 쑥떡 등을 만들어 향긋한 쑥 내음 속에 봄의 정취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식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가 춘추시대 진나라 인물인 개자추介子推와 관련된 설화이다. 개자추는 진나라 문공文公과 함께 망명길에 동행하던 중 굶주린 문공에게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먹게 할 정도로 충신이었다. 마침내 진문공(晉文公:재위 B.C 636~628)이 왕으로 즉위하지만, 개자추에게는 아무런 벼슬을 내리지 않았다. 진문공의 무심함에 잊혀진 개자추는 면산眄山으로 은둔하게 된다. 뒤늦게 후회한 진문공이 개자추를 등용하려고 했으나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진문공은 개자추를 내려오게 하려는 생각으로 산에 불을 질렀지만 개자추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아래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다. 그 후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후일에 탐천지공貪天之功, 즉 “하늘의 공을 탐내어 자신의 공인 체 한다.”는 고사 성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설은 고대의 개화改火 의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이 생명을 가지며, 오래되면 소멸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갱생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불도 마찬가지로 오래된 불은 생명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불을 만들어서 사용해야 된다고 하였다. 곧 한식이란 구화舊火의 소멸과 신화新火 점화까지의 중간단계라고 본 것이다. 이 중 개자추의 설화보다는 개화 의례와 관련된 한식의 유래가 더 유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식을 대표적 명절로 여겨 국가에서는 종묘와 경령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관리에게 3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죄수의 사형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 이후 한식을 주제로 한 많은 시가 전해지는 사실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이미 한식이 중요한 명절로 지켜져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옥과玉果보다 좋은 신선한 차茶 보내왔네. 맑은 향기는 한식寒食 전에 따서 그런가 고운 빛깔은 숲속의 이슬을 품었네. 돌솥에 물끓는 소리 솔바람 소리인 양 자기磁器 잔盞에 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한다. -고려 때 이제현의 시 중에서 한식날 행해지는 풍습 한식에는 조상의 묘소를 돌아보고 간단한 제물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내는 묘제를 지내는데, 절기상으로 봄이라는 계절의 시작이기 때문에 이날 개사초와 봉분의 보수를 하기에 알맞은 날이기도 하다. 묘제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가례』에 의거하여 명절에 행하는 묘제를 1년에 한 번씩만 행하도록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까지도 전국에 남아 있는데, 지역과 집안에 따라 집에서 차례를 지낸 후에 성묘를 하기도 하고 묘소에서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한식날의 날씨를 통해 그 해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농촌에서는 이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적으면 그 해 풍년이 들고 날씨가 궂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 여긴다. 또 서리가 내리면 큰 가뭄이 오며, 특히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불행한 일들이 일어날 흉조로 여긴다. 어촌에서는 반대로 이날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면 물고기가 많아져 풍어가 될 조짐이며, 천둥이 치면 잔고기가 적게 잡힐 조짐이라고 여겼다. 한식날 전해지는 놀이로는 함경남도 지역의 ‘돈돌날이’ 놀이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한식 이튿날, 함경남도 북청 지방의 부녀자들이 강가나 모래산 기슭에 모여 달래를 캐고, 오후가 되면 ‘돈돌날이’를 비롯하여 20여 가지의 유행하는 민요들을 번갈아 부르며 춤을 추는 놀이인데, 특히 ‘돈돌날이’가 가장 대표적인 노래로 불리면서 함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있다. 돈돌날이 돈돌날이 돈돌날이요 모래 청산에 돈돌날이요 모래 청산에 돈돌날이요 돈돌날이 돈돌날이 돈돌날이요 시내 강변에 돈돌날이요 시내 강변에 돈돌날이요 (후렴) 돈돌날이 돈돌날이 돈돌날이요 리라 리라리 돈돌날이요 리라 리라리 돈돌날이요 ‘돈돌’이라는 낱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곧 제 굽이로 돌아온다는 ‘회전’을 의미하며, 동틀 날, 곧 여명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옛날 북청 사람들은 지금은 가난하고 살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가 된 우리 땅이 다시 우리의 손에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항일의 성격을 띤 민요로 부각되기도 했다. 한식날 부녀자들이 부르는 가락과 춤이 어우러진 밝고 경쾌한 ‘돈돌날이’ 노래에는 단순히 흥을 넘어 민족정서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민족의 지혜와 정서와 풍류가 담긴 아름다운 전통의 풍습이 점차 우리의 삶 속에서 잊혀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국적 불명의 서구 명절에 밀려 자칫 우리 고유의 명절이 자리를 내어줄 판이다. 4월만 해도 5일 청명을 비롯하여 20일 곡우와 그리고 큰 명절 한식이 들어있지만 날짜를 꼽아가며 이를 중요시 여기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번 한식날 즈음해서는 명절이 갖는 의미와 우리 전통에 대해 되새기며 한식 절기음식들로 봄축제라도 벌여보면 어떨까? 자료제공 /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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