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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술국치 100년과 궁궐의 수난
작성일
2010-01-1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328




수난의 문화재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

지난 2009년 11월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한 지 144년 만에 광화문 상량식이 열렸다. 조선 태조 4년에 경복궁 정문으로 들어선 광화문은 줄곧 서울의 역사적 중심지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새로 지으면서 경복궁의 동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소실되는 운명을 맞이하기에 이르는데, 그 광화문이 철근 콘크리트 시절을 거쳐 다시 고종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역시 고종 때 세운 환구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제에 의해 황궁우 등 극히 일부 구역만 남긴 채 사라진 환구단은 정문도 없이 오랜 기간을 한 호텔의 조경시설인양 버텨와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7년 우이동에서 정문이 ‘발견’되면서 최근 원 위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문이 이전 복원되었다. 차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깃발을 올린 셈이다.




뿔뿔이 흩어져버린 환구단

서울에 남아있거나 복원된 5개의 궁궐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 그리고 종묘와 사직 등을 두고 봉건왕조의 잔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반면 장구한 역사를 갖는 나라의 위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형태나 의미가 타자他者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고민의 종류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황궁우와 그 앞의 삼문, 그리고 석고와 돌난간이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이지만, 1897년 완공된 환구단의 원래 영역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과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 터를 아우를 정도로 광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강의 각축 속에 왕실의 존속과 나라의 안녕을 고민하던 고종은 환구단을 세워 황제를 칭함으로써 역사적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한다. 고종은 이곳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민심을 앙양하기 위해서였는지 미뤄두었던 명성황후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국장으로 치렀다. 당시 독립신문은 황제즉위식의 감격을 이렇게 전한다.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 지다. 조선이 몇 천년을 왕궁으로 지내며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느님이 도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어 이달 십이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느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금월 십일일과 십이일에 행한 예식이 조선 고금 사기에 처음으로 빛나는 일인즉 우리 신문에 대개 긴요한 조목을 기재하여 몇 만 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넓게 하노라.”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그러나 환구단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뒤편 주차장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석고각은 해체되어 남산 북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종루로 이용됐고, 석고각의 정문 광선문光宣門 역시 남산 북쪽 기슭의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1932년 건립된 사찰이며, 동본원사는 1929년 정동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최초의‘제야의 종’ 행사를 열 때 범종을 제공한 사찰이다.

파괴된 환구단 터에 들어선 것은 조선총독부립 경성도서관, 이른바 총독부도서관과 조선경성철도호텔이었다. 특히 조선경성철도호텔은 2만2천여 평방미터의 대지 위에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의 설계로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들어섰는데 석재와 벽돌만 빼고 모두 외국산으로 지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위상을 뽐내는 건물이었다. 황제국과 천황국 사이에 끼어 있다 비로소 황제국으로 거듭난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으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지 않은 건물이라고 해서 비극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재실 건물은 1960년대 말까지‘아리랑하우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귀빈 음식점으로 이용됐고, 환구단의 정문은 군사정권 시절 우이동의 옛 그린파크호텔로 옮겨져 ‘백운문白雲門’이라는 편액을 걸고 호텔의 정문으로, 이어서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이용됐다. 호텔 내에 인수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음식점으로 사용되던 건물 역시 환구단 정문과 비슷한 시기에 옮겨온 점이나 당시 직원들의 증언, 단청 흔적과 대들보 규모 등으로 볼 때 재실 및 그 부속건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복궁 파괴와 함께 진행된 박람회

비단 환구단의 모습만 뒤틀린 것이 아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사업이 시작된 1918년이 아니었다. 그보다 3년 앞선 1915년 9월 11일부터 다음 달 말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그 개막은 경복궁 파괴와 궤를 같이 했다.

이미 1862년 런던세계박람회 때부터 참관을 시작한 일본은 11년 뒤 비엔나를 시작으로 직접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는데, 1977년부터는 일본 국내에서도 내국권업박람회 등을 개최하기 시작했고 1907년 들어서는 조선에서도 박람회를 연다.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를 회장으로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장장 75일 동안 을지로 일대에서 계속된 경성박람회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이다. 문제는 1915년에 들어서면서 박람회 장소가 오랜 기간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해온 경복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경복궁을 무대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조선 통치를 시작한 지 5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식민통치의 치적을 선전하고 일본 상공업인에게 조선의 사정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테면 경성박람회 때는 주로 일본 상품의 선전에 목적을 두었다면, 조선물산공진회는 위생이나 공업, 수산, 임업, 광업, 임시은사금사업 등 일제식민통치와 관련한 산업이나 행정 부분의 치적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1923년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나 식민통치 20주년 즈음인 1929년 역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도는‘조선왕조의 흔적 지우기’라는 면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박람회를 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시관이 필요하다. 수많은 궐내각사 건물들을 헐어 치워버렸음은 물론이다. 애초 ‘5보에 1루, 10보에 1각’이라는 말이 있듯 크고 작은 전각들로 빼곡했던 경복궁이지만 조선물산공진회 때 정전인 근정전과 편전, 침전, 경회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 즉 356동의 건물들이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18개 동의 진열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동쪽 건춘문建春文에서 서쪽 영추문迎秋門 사이에는 횡단도로가 뚫렸고, 치장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옮겨온 석탑과 부도 등이 잔디밭과 분수대에 놓여졌다.

대부분의 석탑과 부도는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 갔지만,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직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되었다 돌아온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만은 아직도 경복궁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포탄을 맞아 산산 조각난 전력이 있어 옮기는 과정에 훼손될까 아직 경복궁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인데,‘억불숭유’ 조선의 궁 안에 불교 유물이 들어오게 된 엉뚱한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전시방식을 보면, 나무로 된 창고 같은 건물에 르네상스식 치장을 덧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물품들은 대부분 서구를 모방해 지은 건물에 집중 전시되었다. 반면 농기구나 어구, 원예품처럼 근대와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조선의 전근대적인 물품’들은 근정전 행각에 배치해 전시했다. 이런 행사에 총독부는 기차 운임의 30%, 증기선 운임의 60%를 할인해 주는 등 조선인들의 관람을 적극 유도하여, 경성박람회부터 1940년 조선대박람회까지 4번의 박람회에 오간 연인원만 약 373만여 명에 달한다. 그곳에서 조선인이 대면하는 것은 결국 근대 일본과 전근대 조선…. 조선총독부가 각종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공간인 근정전과 그 앞마당은 일제를 위한 각종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등이 박람회 포상식을 하거나 훈시를 한 곳은 근정전 용상 자리에 마련된 단상 위였으며, 1921년부터 43년까지 민족해방운동가와 싸우다 죽은 일본 순사를 기리는 ‘순직경찰관초혼제’가 주로 치러진 곳도 바로 경복궁 근정전이었다.  일제의 조선 왕궁 파괴와 희화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선당資善堂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비현각丕顯閣 등이 있는 동궁 일대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총독부박물관을 세웠고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는 총독부미술관을 건립했다. 이때 헐린 건물 가운데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라는 일본인 상인에게 팔려 도쿄로 팔려갔는데,‘조선관朝鮮館이라는 사설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불에 타 주춧돌만 남고 모두 타버렸다. 1995년 12월 한국으로 환수되어 경복궁 경내에 쓸쓸히 놓여 있는 주춧돌이 이것들이다.


희화화된 창경궁과 아예 사라져버린 경희궁

경복궁이 파괴의 대상이었다면 창경궁은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1911년부터 해방이 되고도 한참 뒤인 83년까지 아예 ‘궁’ 대신 ‘원園’으로 불렸던 창경궁.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자 궁내부 차관이던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의 제의로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이 들어선다. 순종이 창덕궁에 있을 때 거의 한 궁처럼 여겨지던 창경궁이 행락시설이 가득한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메이지정부가 에도에 입성한 뒤 도쿠가와德川 가문 쇼군들의 묘와 보리사인 칸에이지寬永寺 등이 있던 우에노 일대에 공원을 만들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운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즉 옛 정치권력의 컬러를 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순종은 아직 그 공원 옆에서 엄연히 살고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

1918년 1월 창경원을 찾은 영친왕은 “도쿄 동물원에도 없는 하마가 있다”며 신기해할 정도로 창경원에는 코끼리나 홍학 등 이국적인 동물들이 많았고, 유리 대온실을 중심으로 하는 식물원에도 진귀한 식물들이 여럿 진열되었다. 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慈慶殿 자리에는 1911년부터 1992년 철거될 때까지 박물관으로 이용된, 마치 오사카성처럼 생긴 장서각藏書閣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1617년 창건된 경희궁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거의 모든 건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지금이야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옮겨졌던 위치에서 다시 옮겨왔지만 그마저도 원래 위치가 아닌 데다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가 새로 지은 것들이다. 비극의 시작은 일제가 통감부중학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이미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지만, 궁 안에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몇몇 남아있는 건물들마저 원 의미를 잃고 말았다. 정문인 흥화문은 환구단의 석고각처럼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쓰였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과 회상전會祥殿은 남산에 있던 조계사曹溪寺로 이전되어 일본 사찰의 부속 건물로 사용됐다. 이 외에도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건물이 들어선 달성궁達城宮과 대한의원 본관이 들어선 경모궁景慕宮과 함춘원含春苑까지. 일제의 식민정책과 함께 스러져간 조선왕조의 건물들은 한두 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다면 우리는

올해는 장장 20년 동안 계속되어온 경복궁 복원공사가 끝나는 해임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성벽이 헐린 숭례문 복원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이다. 게다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종묘-창경궁 사이 율곡로 지하도로화 사업도 벌어진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뜻 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마냥 뿌듯해 하기에는 이른 면도 있다. 멀게는 주지집무실로 사용되다 화재로 불타 사라진 회상전과 달리 숭정전은 지금도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正覺院이라는 현판을 걸고 대학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1977년 언덕배기 위로 옮겨지기 전까지 강의실이나 체육관 등으로 사용된 탓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 하다. 가깝게만 보아도  2008년 봄에는 한 방송사가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앞에서 노래자랑대회를 열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다섯 달 넘게 한 명품업체의 이벤트장으로 대여됐다가 문제를 일으켜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건물만 복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글·사진 | 권기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저자   
사진·서울시청 문화국 문화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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