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규제혁신

제목
[문화재답사기] 선비의 자태, 창덕궁 연경당을 찾아서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09-21
조회수
6495
작성자 : 강현규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

요즘의 세상사가 하도 번잡하기에 귀가 시끄럽고 눈도 까칠하여 창덕궁의 연경당에 들기로 했다. 간만에 입궐해서 연경당의 소박함과 기품에 눈과 귀를 좀 씻어볼 요량에서였다.

연경당은 순조 때 효명세자의 청으로 지어졌는데, 왕실에서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궁내에 있으면서도 단청도 칠하지 않아 고졸한 분위기가 그만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지만 이 사대부 집을 통틀어 그냥 연경당이라고 부른다.

연경당 앞 느티나무
<연경당 앞 느티나무>
사대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경당 앞 넓은 터에도 느티나무가 있어,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이곳에 자주 들어 쉬었다던 순조가 여름철이면 그 푸른 가지에 깃든 매미 소리에 세상시름과 더위를 씻었을 법하다. 이 느티나무는 한때 중병에 걸려서 나무둥치의 절반을 에폭시 수지로 때우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굳세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오랜 투병생활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지닌 나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오랜 세월 조선왕조의 쇠락을 지켜보아 왔을 이 늙고 병든 느티나무를 볼 때마다 제법 마음이 짠해진다. 돌로 물길을 꾸민 명당수가 연경당 앞을 멋진 곡선으로 휘돌아 나가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만 하지만 연경당의 입구에는 알고 나면 감탄하며 무릎을 칠만한 숨겨진 상징들로 가득하다. 먼저 연경당 가는 길에 놓인 석함 중에 웬 짐승이 새겨진 석분이 눈에 띤다. 처음엔 이놈의 정체가 과연 뭘까 참 궁금했는데 이 책 저 책 뒤지다보니, 딱 떨어지게 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이놈이 ‘토끼’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석함에 새겨진 토끼
<석함에 새겨진 토끼>
또 연경당 앞, 명당수를 건너기 전에 있는 석함을 쭈그려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귀퉁이에 두꺼비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재밌다. 세 마리는 나오려고 하고 한 마리는 도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양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로 인해서 석함이 놓인 정적인 공간은 율동감이 생기고, 두꺼비들도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생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토끼와 두꺼비는 모두 달에 살고, 또 달을 상징하는 동물들이란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절구질을 하는 옥토끼는 익숙하지만 다만 두꺼비는 좀 낯설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여기엔 ‘예’라는 영웅의 설화가 있었다. ‘예’의 아내 ‘항아’가 ‘예’의 불로장생약을 훔쳐서 하늘나라로 도망갔는데 이를 괘씸하게 여긴 천제가 항아를 흉측한 두꺼비로 만들어 달나라로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양에선 두꺼비가 달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여튼 토끼와 두꺼비를 통해 연경당은 천상의 달나라를 상징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앞을 흐르는 개울은 은하수가 되고, 그 다리는 오작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연경당의 대문 이름이 ‘장락문(長樂門)’이다. 신선들이 사는 궁이 장락궁이니 연경당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자기들이 사는 곳을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돈이나 펑펑 들여서 처덕처덕 금가루나 바르지 않고, 이렇게 내밀한 상징을 통해 심리적 호사를 누리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옛사람들의 ‘품격’이 아닐까 싶다. 장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다시의 두 개의 문이 있다. 왼쪽의 것이 수인문이고 오른쪽의 것이 장양문이다. 하나는 사랑채로 드는 것이고 하나는 안채로 드는 것인데 이름부터 좀 표가 난다. 장양(長陽)이 ‘햇빛아, 길게 들려무나. 놀기도 하고 공부도 좀 하게.’ 뭐 이런 뜻이라면 수인(脩仁門)은 ‘인(仁)을 닦아!’ 뭐 이런 뜻이니까. 게다가 옥편을 찾아보니 수(脩)자는 닦을 수(修)자의 아자로 ‘반찬을 만든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또 장양문은 수인문보다 크기도 크고 솟을대문으로 되어있다. 주인 양반이 초헌을 타고 드나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인문과 장양문 사이의 벽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벽돌이 떨어져 나간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건 놀랍게도 벽에 난 굴뚝이었다. 수인문의 바닥을 보면, 지금은 관람객은 안전을 위해서 나무로 막아놓았지만 원래 아궁이 자리였던 곳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불을 피우면 벽에 뚫린 그 구멍으로 연기가 나가게 되는 것이다.

벽에 난 굴뚝
<벽에 난 굴뚝>
이 벽에 가까이 와서 뒤돌아서면 바깥 행랑채가 보인다. 바깥 행랑채엔 지위가 낮은, 그래서 나이도 어리고 힘도 팔팔한 녀석들이 묵는 법이다. 문밖에서 행패라도 부리면 냉큼 뛰어나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할 테니까 말이다. 그 벽에 그대로 기대어서서 볼 때 오른쪽 끝은 마굿간, 가마간 용도이고, 왼쪽 끝은 바깥 변소, 즉 외측이다. 어두컴컴해서 잘 안보이지만 외측에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어서 재미난 느낌이 든다. 원래부터 이 모양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머슴들이 한꺼번에 볼일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 노는 꼴은 봐도 머슴 노는 꼴은 못 본다.’란 속담도 있지 않은가.

구멍이 두개 뚫린 외측
<구멍이 두개 뚫린 외측>
바깥 행랑채 주변을 구경하고 나서 사랑채인 연경당으로 들었다. 사랑채는 주인양반의 일상거처로 이곳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된 공간이다. 조선시대, 세력 있는 대가 집에는 항상 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은 식사를 제공받는 식객으로 세상소식을 주인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른바 듣고 말하는 신문이었던 셈이다. 식객들은 저마다 정치면, 사회면, 혹은 연예면이나 가십난 등을 담당하며 제 밥값을 했다고 하니, 요새처럼 만큼은 아니어도 조선시대에도 ‘정보수집’은 꽤 중요한 정치활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식객은 중문간의 행랑채에서 묵는데 머슴들의 대장 ‘청지기’도 이곳에 묵는다고 한다. 주인이 필요한 것들을 제깍제깍 눈치 빠르게 챙겨야할 테니까 말이다.

연경당 앞엔 반듯하게 깎아놓은 돌 하나가 있는데 이는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는 노둣돌로 하마석(下馬石)이라고도 한다. 사랑채 마당을 휙 둘러보면 그 짜임새가 아기자기한데 괴석과 석함도 있고 마당 모퉁이엔 석련지(石蓮池)가 있다. 석련지는 이곳에 물을 채워 연꽃을 띄우는 것으로 연못을 대신하는 것인데 연꽃이 피었던 모습을 상상해보니 그 정취가 꽤나 쏠쏠하다.

석련지
<석련지>
그러나 이렇게 꾸민 사랑채의 마당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와 안채를 나누는 담이다. 이를 ‘내외담’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의 ‘남녀유별’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내외담에도 문이 달려있긴 하지만 손님이나 식객이 집안에 있을 땐 이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있어야 하는 것이 양반집의 법도였다.

연경당 옆의 건물은 ‘향기가 좋다’란 뜻의 선향재(善香齋)이다. 여기서 좋은 향기란 바로 책의 향기를 말한다. 외국인들은 ‘좋은 향기’란 설명만 듣고선 이곳이 부엌인줄로 착각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재미있었다. 선향재는 그 이름답게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곳인데, 그래서 따로 동판으로 지붕을 내어달아 햇빛을 막고 있다. 그리고 이 동판 지붕 밑에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으로 차양을 달고 이를 조절할 수 있게 끈을 달아 놓았다. 동판 위쪽을 쳐다보면 이 차양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도르래를 볼 수 있다. 이 차양은 햇살이나 비, 바람을 막아 주는데, 이런 구조가 이미 신라의 황룡사 금당에도 있었음이 황룡사 발굴조사에서 입증되었다고 한다.

차양을 조절하는 도르래
<차양을 조절하는 도르래>
이제 연경당의 뒤뜰로 해서 우신문(佑申門)을 통해 안채로 들어선다. 우신문은 그 높이가 낮아서 사랑채와 안채를 오가는 조심스러움을 사람이 절로 느끼도록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신문의 이름은 도울 佑자에다, 申자에는 원숭이 외에도 서남쪽, 오후 4시, 거듭하다, 말하다, 되풀이하다란 뜻이 있는데, 어떤 책에도 나와 있지 않아 그 뜻을 새기기가 쉽지 않았다. 내 최종 해석은 ‘한 마디 붙이러 가는 문’이었다. 이문을 통해 안채로 든 주인양반이 안주인에게 “오늘 어땠소?”하고 한 마디 붙인다는 뜻이다. 제법 그럴싸한 것 같기는 한데 전혀 헛다리를 짚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채에 들어서 안방을 들여다보면 사랑채까지 공간이 쭉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개방성’이다. 장지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방이 생기기도 하고 벽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 개방적인 한옥의 구조인 것이다. 보통 땐 장지문을 닫아서 공간을 막아 놓았겠지만 전시를 위해서인지, 연경당의 내부는 볼 때마다 이렇게 문들이 다 열려 있었다. 어쨌거나 밖에서 보기엔 사랑채와 안채가 내외담을 통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안에서는 이렇게 다 통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내외담을 ‘헛담’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사랑채로 뚫려있는 안채
<사랑채로 뚫려있는 안채>
안방 밑에는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아궁이가 있다. 원래 사대부 집에는 이곳에 부엌이 있지만 연경당은 그렇지 않다. 연경당은 살림살이에 쓰이는 공간이 보통의 사대부 집에 비해 무척 좁은데 이는 아마도 연경당이 왕실의 ‘사대부 체험’ 위주로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에 연경당의 부엌은 안채 뒤쪽에 따로 담을 낸 별채에 있다.

안채 뒤쪽은 별채인데 귀한 딸을 집안 가장 깊은 곳에 꼭꼭 감춰놓는 곳이 원래는 바로 이 별채이고 이 별채에 머무는 그 귀한 딸이 우리가 흔히 들었던 ‘별당 아씨’이다. 하지만 연경당에서는 이 별채에 별당 아씨를 모시는 대신에 반빗간을 두었다. 반빗간은 원래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손질하고, 바느질을 하는 등 집안의 안살림을 하는 곳으로 바로 과거 우리네 여인들의 눈물과 웃음소리가 함께 배어 있는 곳이다. 창덕궁의 후원에 자리 잡은 연경당은 언제 들러도 몸가짐 단정한 선비를 마주 대하는 기분을 갖게 한다. 그 그윽함에 취해 연경당을 거닐다보면 세상사에 치여 흩어졌던 마음이 절로 달래지는 것이다.

창덕궁과 그 후원의 보호를 위해 전면개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쉽고 가이드의 뒤를 따라다녀야만 하는 것도 아쉽지만, 그래도 옛사람의 넉넉한 향기가 배어있는 이런 곳이 번잡한 도심에서 불과 지척이라는 사실이 고맙기만 할 뿐이다.
첨부파일
  •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이전글
[문화재답사기] 원성왕의 신공사뇌가
다음글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법무감사담당관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