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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과 문화재
작성일
2006-05-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50



두석장 박문열의 장인정신

두석장豆錫匠 박문열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벗어나 벽제로 향하는 길 양옆은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져 봄빛이 제법 환했다. 교외선이 지나는 벽제역의 바로 맞은편 동네에 조선 장석의 명맥을 잇고 있는 박문열씨가 작업하는 공간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번듯한 작업장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초라한 컨테이너 한 동과 천을 덮은 비닐하우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텃밭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160센티미터가 채 될까, 단신에 짧게 깎은 머리가 막 서리를 이고 있는 초로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작은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그가 바로 조선 장석의 명맥을 잇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인 박문열씨였다. 이윽고 필자를 이끌고 들어선 곳은 조금 어두운 컨테이너 작업실. 실내는 두 평 반 남짓할까, 입구에서 우측으로 작업대가 놓여있고 온갖 작업도구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방에는 작업도면이 수북이 쌓여 있고 다양한 전통자물쇠가 장식대 위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손님을 맞는다. “장인은 오직 장인일 뿐이야!” 단호한 어조의 이 짧은 정의는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다. ‘마치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주문 같은 것은 아닐까’라는 짐작을 해 보았다. 그 정도로 그의 살아온 방식이나, 철저하게 전통만을 고집하는 두석장으로서의 작업방식 등 그의 모든 면면은 수도승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장인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마음가짐이야, 마음가짐이 완벽해야만 작업이 가능한 거지.” 장인에게 요구되는 완벽한 마음가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40년간 두석장으로 살아오면서 저절로 결론 지워진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장인은 세상이나 물질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가난에 대해서도 떳떳해 보였다. “재너머 용미리에 벌써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 되는 제자가 있어요,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인정하지 않아! 아직은 세상의 가치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

박문열, 그는 선대로부터 도제 방식으로 장석을 익혀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기능보유자에 오른 경남 통영의 김극천씨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초등학교만을 겨우 마치고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그가 18세 되던 해 인사동에서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 스승, 윤희복(타계)씨 역시 일개 장인이었던 것이다. 박문열은 장석의 세계를 오로지 타고난 감각과 독학이라는 방식으로 깨우쳐 나갔다. 그가 전통 8단 자물쇠 앞에서 지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전통자물쇠의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가 92년, 진주의 장석수집가인 태정 김창문씨 소장의 7단 자물쇠를 만난 일화였다. 김창문씨의 소장품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여 박문열에게 사진 찍는 것도, 스케치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만져 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7단 자물쇠의 구조를 머릿속으로만 입력한 채 곧바로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와 서울 홍은동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라면만 끓여 먹으며 복원에 들어갔다. 결국, 4일 째 완벽한 복원에 성공, ’93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과연 전통자물쇠의 구조를 보면 선조의 지혜와 과학성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광두정을 밀어올려야만 열쇠구멍이 나타나고 열쇠를 꽂는다 하더라도 오른쪽으로 틀어야 할지, 왼쪽으로 틀어야 할지, 아니면 45도 각도로 기울여 돌려야 하는지, 아무나 쉽게 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작업은 그 종류나 복원의 범위에서 광대했다. 수백 가지의 자물쇠를 복원하는 일도 그렇지만 건축물의 수많은 장석을 비롯한 전통 목가구에 쓰이는 장석만 해도 수백, 수천 가지에 이른다고 했다. 가구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같은 가구라 해도 지방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을 복원하는 일이 한 개인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니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거의 천형에 가까운 고통일 것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닐하우스의 작업실로 안내를 했다. 가던 중에 반닫이 장이 끈도 풀지 않은 채 놓여있는 것을 보고 연유를 물었더니 “아, 대구에서 장석을 해달라고 보내왔는데 아무래도 아닌 거야, 그래 다시 내려보낼 물건이지.” 그의 철두철미한 장인근성은 자신의 장석이 쓰일 그 반닫이가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고 퇴짜를 놓은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이 오늘의 두석장 박문열을 만든 바탕일 게다. 비닐하우스의 내부는 거의 공장 수준에 가까웠다. 온갖 작업도구와 작업 중인 물건들이 둘러져 있었다. 드디어 자신의 대표적 장석인 시우쇠 숭숭이 반닫이를 보여 주었다. “시우쇠란 일반 무쇠와 달라요. 무쇠는 탄소함유량이 많아서 뚝뚝 부러지지만 시우쇠는 가단철이라 탄소함량이 낮아서 탄도가 높으면서 부드럽지, 하지만 시우쇠 장석을 일일이 정으로 투각하여 장석을 만드는 일은 고난도의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해.” “요즘에도 이걸 하고 있으니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이지.” 비닐하우스 작업장을 나오자 손바닥만 한 텃밭 위로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한 아주머니가 밭일하고 계셨다. 박문열씨는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작업을 하다가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아프면 텃밭에 나와요.” 소년 같은 미소를 보이면서 수줍어했다. “하나의 장인이 탄생하려면 무엇보다 내조가 제일 중요하지, 내조가 바로 장인을 만들거든, 지금은 시집간 딸이지만 예전 홍은동 작업장 시절, 한겨울에도 십구공탄 하나 피워놓은 채 그 딸내미를 뉘어놓고 저 사람은 파출부 일을 다녔어, 그래서 나는 마음껏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거야.” 다시 컨테이너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소목장과 두석장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존재이지. 아무리 잘 만들어진 목가구가 제작되어도 제 규격, 제 문양의 장석이 제자리에 제대로 된 모양으로 장식되지 않으면 완성품이라고 할 수 없거든. 그러기에 소목장과 두석장은 최소한 십 년은 호흡을 맞추어야 제대로 물건을 만들 수 있지.” 그래서인지 소목장 박명배씨와 20년째 작업을 같이 해오고 있다고 했다. 오는 29일 경희궁에서 열리는 2006, 서울무형문화재축제에 서각의 오옥진, 갓의 박창영씨와 함께 일반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시연을 펼칠 예정이란다. 그리고 올해 가을에는 조선일보사 갤러리에서 서울, 경기지역의 무형문화재 5인의 초대전이 열리기 때문에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했다. 필자가 보기에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계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소망하는 꿈을 물었다. “글쎄, 그저 경기도 한적한 곳에서 한 이백여 평의 땅에 전통적인 시스템을 갖춘 내 작업장을 꾸미는 거야, 한편엔 조그만 전시관도 지어서 그동안 해왔던 내 결과물들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두석장 박문열씨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예전보다 두석장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고 작업공구도 많이 개량됐다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행복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물겨운 내조로 오늘날의 그를 만든 아내가 있고 자기를 닮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 장학생으로 커나가는 아들과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보다도 두석장 박문열, 그의 가장 큰 행복은 아직도 복원해야 할 장석의 세계가 남아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해낼 열정과 건강이 아닐까. 인터뷰 / 작가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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