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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철의 왕국, 가야
작성일
2019-05-3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929

철의 왕국, 가야 문화재 발굴로 세상에 드러난 가야의 경제와 문화 경상도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서 힘을 키웠던 작은 나라 ‘가야’. 10여 개의 소국이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여러 나라에 수출한 철의 왕국이었다. 특히 철로 만든 여러 가지 농기구나 무기들은 참으로 훌륭했다. 01.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은 고대국가 형성기의 고분으로, 구릉지와 저습한 평지의 지형관계로 목제품 유물의 보존이 가능한 지형이다. ©문화재청

가야 연맹왕국의 성장 배경은 무엇인가?

가야 연맹왕국의 소국들은 일찍이 벼농사를 지으며 농경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높은 농업 생산력과 더불어 해상 중계무역 또한 번성했다. 가야는 주변국은 물론이고 바닷길을 통해 북쪽의 한 군현, 동해안의 예, 남쪽으로는 왜와도 교역을 했다. 이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우수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가야는 또한 철의 생산을 통해 경제력을 구축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삼한과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왜나라까지 철을 수출했다고 한다.


특히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는 철이 넘쳐났는데 금관가야는 이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처럼 가야의 대표적 철 생산지라 할 수 있는 김해에는 근대까지 조업한 대동면의 상동광산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철을 공납하고 있었다. 또 생철리와 같은 제철과 관련된 지명도 있고, 근년까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에 들어서 맹주로 떠오른 고령 지역 대가야의 성장에 있어서도 철광 개발과 이를 통한 철의 생산이 큰 기반이 되었다. 즉 철을 통한 풍부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이 대가야의 성장에 있어 주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5~6세기 무렵 대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산 남서쪽에 분포하는 철산 개발을 통한 활발한 철의 제련과 이를 통한 철 생산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02.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투구 ©위키백과 03, 04.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철갑 ©위키백과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가야가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이다. 고대사회에서 철 생산은 고도의 기술적 수준이 요구된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군사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철 생산은 대부분 국가가 관장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철 생산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선 양질의 철광석이 필요하다. 다음은 풍부한 산림 자원으로부터 생산되는 대량의 목탄이 필요하다. 목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벌목과 운반은 물론 목탄요를 축조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생산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제철로의 축조에는 점토와 모래·물 등은 물론, 철광석을 선광(選鑛)하고 파쇄 또는 배소(焙燒)하기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 또 송풍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철 생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전문 기술자를 포함한 다수의 인력이 필수적이었다. 철광석과 목탄이 확보되면 제련로(製鍊爐)를 축조한다. 제련로는 고온에 견딜 수 있도록 점토와 모래, 짚 등을 함께 이겨 만들었다. 목탄을 넣고 가풍하며 고온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하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하는 기초 시설을 갖추고 그 위에 노를 축조했다.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다음은 제련로에서 생산된 괴련철 혹은 부분적으로 선철이 함유된 괴련철을 소재로 하여 다시 정련하는 정련로(精鍊爐)가 필요하다. 정련로에는 단조 철기 생산에 필요한 제강 공정과 제련된 철괴를 장시간 가열하며 탄소량을 높여 선철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따라서 정련로 에서 만들어진 선철을 용해하여 주조 작업을 하는 용해로(鎔解爐), 그리고 정련 과정에서 제강된 소재를 이용한 단조 작업의 단야로(鍛冶爐)를 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가풍 장치로 풀무와 송풍관이 사용됐다. 목탄을 연료로 인위적인 가풍을 하지 않고서는 제련 작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최근 김해 봉황대 유적에서 제철에 사용된 송풍구 파편과 쇠똥(slag)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송풍구는 용광로에 꽂아 바람을 넣는 토제 관으로, 강한 불에 타 까맣게 변질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쇠똥은 제철할때 나오는 쇳물의 찌꺼기가 굳은 것이다. 또한 양산 물금을 중심으로 대규모 제철작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해 대성동, 동래 복천동 유적 등 여러 가야 유적에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했던 철 집게와 망치 등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05.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출토 유물 ©문화재청 06.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출토 칠초동검 ©문화재청

어떻게 철을 사용하였는가?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와 함께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가야의 철을 웅변하는 것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기들이다. 3세기까지 김해와 경주에서 출토되는 철기 중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보다 많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의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며, 가야에서 수출된 철은 신라와 왜의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07.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전경 ©문화재청 08.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목관 노출 모습 ©문화재청

종류로는 도끼 모양의 납작도끼[板狀鐵斧]가 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을 비롯한 가야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덩이쇠인 철정은 김해 대성동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 등 가야의 주요 유적에 위치한 대형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수많은 갑옷과 무기들이 가야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야 제국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제적 배경의 하나가 바로 철의 생산이었던 것이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판상철부(板狀鐵斧)와 덩이쇠[鐵鋌]는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교환에 사용되었고, 수출되어서는 여러 철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문화재 발굴과 관련된 직업 문화재보존처리원 Q&A 이재성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재성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사

● 문화재 발굴과 관련된 직업이 궁금한 당신을 위한 미니 인터뷰


Q. 문화재보존처리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A. 문화재보존처리원은 금속, 목재, 종이, 석재, 직물, 벽화 등 다양한 재질의 문화재를 직접 보존처리하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보존처리는 손상된 문화재의 수명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문화재에 적절한 보존 조치를 취하 는 것으로 여기에는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


Q. 문화재보존처리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신문에서 우연히 ‘병들고 아픈 문화재를 고치고, 문화재에 새 생명을 준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문화재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관심으로 보존과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금속공학을 전공하면서 금속문화재 보존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A.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될 수 있는 전공을 택하여 공부하고 문화재청에 입사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들어왔습니다. 문화재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그 문화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문화재 등 장인의 공방을 찾아다니며 문화재와 유사한 형태의 공예품 제작 과정을 조사하고, 실습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문화재 보존처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라는 직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 심하게 훼손된 문화재가 보존처리를 통해 잃어버린 형태를 되찾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특히 보존처리한 문화재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현재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 일만의 장점입니다. 모든 문화재를 보존처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보존처리는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고, 후대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에 항상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옛사람의 흔적 중 하나를 후대에 잘 전달했다는 보람을 생각하면 어려움은 금방 사라집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A. 2014년 9월 전라남도 나주시 정촌고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을 때입니다. 석실 내부에서 온전한 상태로 노출되었는데, 내부에는 흙이 많이 차 있었고, 재질도 매우 약해진 상태라서 석실 내부에 직접 들어가 보름 가까이 보존처리하며 금동신발을 안전하게 수습했습니다. 석실 내부가 좁고 어두운 데다가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기 때문에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단 하나의 문화재인 금동신발에만 집중하고, 안전하게 수습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


Q.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요?

A. 지금도 문화재 현장에서는 문화재보존처리원들이 구슬땀 흘리며 많은 문화재를 보존처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보존처리를 잘 모릅니다. 문화재 현장에서 문화재보존처리원들이 하는 보존처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것이고, 이를 통해 다소 생소한 보존과학 분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희망합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되고 싶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 말씀 남겨주세요.

A. 우리가 보존처리하는 대상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문화재이기 때문에 보존처리할 때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그 문화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증거를 남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재의 재질과 특성을 잘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문화재에 대한 애정입니다.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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