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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00년 만에 돌아온 ‘고려 나전칠기 경상(高麗螺鈿漆器經箱)’
작성일
2016-03-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225

800년 만에 돌아온 ‘고려 나전칠기 경상(高麗螺鈿漆器經箱)’ 2015년 리움에서 개최되었던 ‘세밀가귀(細密可貴)’ 전시에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소장된 고려 나전칠기가 한 자리에 모여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었고 ‘왜 고려 나전칠기가 최고의 미술품인가’를 실감케 했다. 전시를 마치고 다시 해외 각지의 소장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서글픈 현실이 안타까웠다. ‘고려 나전칠기 경상’은 국내에 환수된 유일한 고려나전 경상이라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은 많은 보수로 인해 더욱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전세계로 흩어진 고려 나전칠기 환수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될 수 있었다. 앞으로 구입을 비롯한 나전칠기 환수의 적극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덩굴 무늬의 X선 사진. 황동선을 박아 넣었다. 지름 1.5cm의 모란당초문 연주문 구슬 모양

 

국내 유일 고려 나전칠기 경상

지금 한국 미술품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 고려불화와 함께 나전칠기를 꼽는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20여 점 남짓 남아있지 않은 희소가치성으로 인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려시대 나전대모로 만들어진 작은 불자(拂子) 1점이 유일하였다. 그러던 중 2014년 일본에서 사들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고려 나전칠기 경상은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려 경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의 칠기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기원전 1세기경에 제작된 다호리(茶戶里) 출토의 칠기들과 광주 신창동(新昌洞)에서 발견된 목재칠 현악기를 보면 일찍부터 고유의 칠기 문화를 확립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전통적으로 칠기의 재료 수급과 생산을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어 통일신라에는 이미 ‘칠전(漆典)’이라는 칠기(漆器) 전담 기관이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의 나전칠기 문화는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고려에 들어와 가장 빛을 발하게 되는데, 왕실 공예품을 생산하는 ‘중상서(中尙署)’에서 나전칠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 1272년(고려 원종13)에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수납하는 ‘나전경함(螺鈿經函)’을 대량으로 제작한 것이 확인된다. 일찍이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세세하고 치밀하여 매우 귀하다(세밀가귀細密可貴)”라고 고려 나전칠기의 우수성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다.

세밀함의 극치, 고려 나전칠기의 미학

고려 나전칠기의 특징은 자개와 함께 은, 동, 황동 등의 금속선을 넝쿨선이나 기물의 경계선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철사 모양으로 꼬은 단선은 꽃문양의 가지 줄기로 주로 사용하였고, 두 줄을 꼬은 선은 기물 주위나 모서리 부분에 붙여 장식함으로써 기물을 잡아주는 보강의 역할과 의장되는 구획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삼았다. 특히 나전과 함께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투명한 뒷면에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색깔이 은은히 표면에 드러나 보이도록 한 복채(伏彩) 기법은 고려 나전칠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고려 나전에 사용된 대모 복채기법은 단순한 나전의 색감에서 색채효과를 살린 고려만의 창안이며 색감의 변질을 막는 보호막 기능도 함께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고려 나전칠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나전을 끊어 시문하는 줄음질 기법의 독특함도 주목할 만하다. 나전패에서 잘라낸 무수한 절문(截文)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양이 될 수 없지만 이들이 모여 같은 형태 또는 다른 형태로 조합되어 새로운 문양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세밀함은 최소의 단위가 되는 절문의 크기가 사방 1cm를 넘는 것이 없으며 여기에 음각의 선으로 꽃잎이나 잎맥의 섬세함까지 표현함으로써 그야말로 세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보수로 인해 고려의 아름다움 재현 아쉬워

800년 만에 돌아온 고려 나전칠기 경상은 당시 불경을 담아두던 경상이지만 높이 22.6㎝, 가로 41.9㎝, 세로 20.0㎝의 크기로서 일반적인 경상에 비해 작은 편이다. 형태는 방형의 상자 위에 사면의 모서리를 죽인 뚜껑을 덮은 형태로서 뚜껑이 몸체에 비해 돌출된 편이며 그 사면의 경사도 조금 어색하다. 이는 경상이 많은 보수가 이루어진 점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장 면에서는 뚜껑 상부면과 측사면, 그리고 외측면의 외곽선을 따라 돌출된 줄로 경계선을 두었다. 외구에는 주로 옆으로 바라본 형식의 모란 당초문을 길게 이어지도록 시문하였고 내구의 주 문양으로는 작은 잎으로 구성된 위에서 바라본 모란 당초문을 매우 촘촘히 시문했다. 여기에 당초문의 줄기는 0.3㎜ 정도 두께의 얇은 황동 금속선을 사용하였으며 무늬와 무늬의 경계를 짓는 선에는 2개를 하나로 꼰 선을 사용하였다. 뚜껑과 몸체의 연결부는 위, 아래로 방형의 긴 장석을 옆으로 배치하고 그 중앙을 역시 직방형의 자물쇠를 부착한 단순한 모습은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판단된다. 측면에는 다른 고려 경상에서 많이 보이는 구름 모양의 손잡이가 양쪽에 달려 있다. 전면에 빈틈없이 채워진 모란당초문양은 고려 후기 상감청자의 문양과 많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도식화된 모습이어서 시대적으로 조금 늦은 시기의 제작임을 보여준다. 외곽에 군데군데 칠이 갈라지고 모란당초문을 비롯한 자개무늬가 떨어져 있으며 외곽부는 거의 새로운 목재를 대어 붙여 고려 경상이 지닌 굴곡지면서도 우아한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원형까지 손상시키는 무리한 보수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좋은 선례를 보여준 문화재인 셈이다.

 

글‧최응천(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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