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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0여 년 전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작성일
2023-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92

100여 년 전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전라남도 목포시에는 총 30개소의 국가등록문화재가 분포한다. 대부분 유달산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유달동과 만호동 일대에 몰려 있다. 조선시대에 목포진이 자리했던 이 일대는 1897년 목포항의 개항과 함께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지금도 당시에 만들어진 바둑판식 도로와 일본인들이 지은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00.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과 목포항 전경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목포를 떠올릴 때마다 맨 먼저 이 짧고도 강렬한 문구가 뇌리를 스치곤 한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이 노래한 대중가요의 제목이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발표된 <목포는 항구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미자, 남진, 조미미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목포를 노래했지만, 이 곡만큼 목포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노래는 없을 성싶다.


목포는 언제 항구가 되었을까? 세종 15년(1433)부터 고종 21년(1895)까지 종4품 무관인 만호가 배치된 목포진이 설치됐지만, 목포 자체는 작고 한적한 어촌이었다. 목포가 근대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고종 31년(1897)부터였다. 그해 7월 4일 목포항의 개항을 알리는 조선 조정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석 달 뒤인 10월 1일을 기해 목포와 진남포 2곳을 외국과의 통상을 위해 개항하고 외국인의 거주도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목포항이 호남의 관문이자 일제의 수탈 창구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목포를 근대 항구로 개항한 이유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이점이 무엇보다도 컸다. 영산강 뱃길을 거슬러 오르면 내륙 소비도시인 나주, 광주 등과 곧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라도 일대의 드넓은 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실어 나르는 데도 더없이 편리했다. 그러나 목포항이 개항한 지 불과 다섯 달 만인 1898년 2월 전국 최초로 조선인 부두노동자의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일본인 자본가들과 중간관리자인 ‘십장’들을 상대로 한 동맹파업은 1903년까지 8차례나 계속됐지만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목포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외국인 거류지인 ‘각국공동거류지’는 ‘일본인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유달산 노적봉(64.9m) 중턱의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구 일본영사관(사적) 주변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01.목포의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구 일본영사관(사적).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노적봉 중턱에 자리 잡았다. 02.현재 목포근대역사관2관으로 활용 중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03.최근 우리 밀 빵집이 들어선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주택-3, 드라마 촬영을 위한 일본어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다. 04.‘120년 된 적산가옥 카페’로 변신한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의 기분 좋은 방황

구 일본영사관은 1900년에 2층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져서 1907년까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1914년부터는 목포부청사, 1974년부터는 목포시립도서관을 거쳐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1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포의 근대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이 건물은 외형뿐만 아니라 대리석 장식의 벽난로와 거울까지도 건립 당시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구 일본영사관 건물 뒤편에는 옛 목포부청사의 별관이자 서고로 사용됐던 2층 석조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오른쪽에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군의 공중 폭격에 대비해 굴착한 방공호도 있다. 총 길이 72m의 이 인공터널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파놓은 것이다.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면적은 114,038㎡(약 34,496평)로 별로 넓지 않은 편이다. 총 30개소에 이르는 목포시의 국가등록문화재 가운데 무려 18개소가 이 공간 안에 분포돼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 15개소의 건물 중에서는 11개소가 ‘번화로’라는 큰길가에 자리 잡았다.


전체 길이도 짧고 면적도 넓지 않아서 딱히 목적지를 두지 않고 방황하듯 걸어도 기분 좋게 둘러볼 수 있다. 목포의 근대 건축물 중 상당수는 여전히 제구실을 다하고 있다. 근대역사문화공간 내의 15개소 중에서도 절반가량은 상가나 주택으로 사용 중이다.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업종은 요식업이다. 나란히 이웃한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1·2·3’ 중 1은 카페, 2는 와인바, 3은 한식당으로 바뀌었다. 잘 조경된 일본식 정원이 인상적인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는 한때 해군기지 관사로 사용됐다가 지금은 ‘120년 된 적산가옥 카페’로 영업 중이다.


카페와 빵집, 목공소로 변신한 국가등록문화재

영산로와 해안로229번길이 만나는 교차로의 모서리에 자리 잡은 ‘목포 해안로 교차로 상가주택’은 1935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은 상가, 2층은 주택으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목포에서 가장 큰 문구점이었고, 지금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서 있다.


번화로와 해안로237번길의 교차로에 위치한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주택-3’은 하나의 지붕 아래에 여러 가게가 나눠진 형태의 일본식 주상복합 건물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지역의 지도자였던 안철 장로의 동아약국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약국 자리는 최근 우리 밀과 천연발효종으로 빵을 만든다는 빵가게로 변신했다. ‘목포는 빵이다’라는 대표 메뉴의 이름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펼친 책을 엎어 놓은 듯한 박공지붕 형태의 창고 3채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는 일부가 목공소로 활용 중이다. 어선들이 몰려 있는 동명동 물양장 근처의 ‘목포 부두 근대상가주택’은 어선에서 필요한 각종 도구와 장비를 취급하는 선구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꼭 들러볼 곳으로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과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에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과 함께 목포 최초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은 1929년에 건립됐다. 일본인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설립한 심상소학교의 부속건물인 이 강당은 연면적 1,176.12㎡(약 335.7평)의 대형 건물인데다 원형도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됐지만, 건물 밖의 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근대역사문화공간을 홍보하는 쉼터도 조성돼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번화로와 해안로173번길의 교차지점에 자리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전라남도기념물)은 1921년에 지어진 2층 석조건물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해 세운 수탈기관이다. 서울(경성)에 본점을 두고 전국 9개 도시에 세워진 지점들 가운데 목포지점이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였다고 한다. 당시 사용한 초대형금고가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광복 직후부터 1989년까지 해군목포경비부, 해군제3해역사령부 헌병대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6년부터는 목포근대역사관2관으로 활용 중이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둘러보는 내내 희비가 쌍곡선을 그렸다. 일제의 수탈 책동에 분노가 치밀다가도 목포만의 별미와 인정을 맛볼 때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맴돈다. 그래서 목포를 한 번만 찾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국가유산 방문하고, 선물 받으세요! 가장 한국다움이 넘치는, 신비로운 우리 국가유산을 함께 만드는 길에 동참하세요. <문화재사랑> 7월호 ‘근대역사기행’ 코너에 소개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방문해 7월 16일까지 인증 사진을 보내주세요. 두 분을 선정해 선물을 드립니다. QR코드를 찍으면 이벤트 참여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인증사진을 첨부해 보내주세요. ※ 국가유산에 따라 출입이 제한된 곳도 있습니다. 소중한 국가유산의 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된 곳은 절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글, 사진. 강훈(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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