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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끗한 백자에 써 내린 시(詩)가 품은 사연
작성일
2023-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95

깨끗한 백자에 써 내린 시(詩)가 품은 사연 ‘울타리 아래 가을 국화가 필 때, 벗〔雨〕을 만나 만 냥을 주고 산 술을 담은 항아리〔壺〕에 달이 담기지 않도록 거푸 술잔〔磁盃〕을 비우고 시(詩)를 지으며 시름을 녹여 내리라...’ 이와 같은 시(詩)를 맑고 깨끗한 백자에 쓴 것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15~16세기에는 산화코발트인 청화[回回靑] 안료로, 회회청 수입이 금지된 17세기에는 산화철 안료로, 18~19세기에는 청화 안료로 시를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00.오도일의 시가 쓰인 백자병, 높이 25.1cm, 부산박물관 소장 01.『서파집』권 팔 「후호촌록」에 실려 있는 오도일의 시 02.오도일의 시가 쓰인 백자병, 높이 22.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에 쓴 시의 주제는 대부분 ‘술’

백자에 시문(詩紋)을 쓴 담당자는 주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과 승정원 소속의 사자관(寫字官)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분원의 사번(私燔)이 활발해지면서 화원 외에 분원장인 중에서 청화장식을 전담한 화청장(畵靑匠)도 시문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시문을 쓴 백자의 종류는 조선 전기에는 주로 전접시에 국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항아리, 병, 문방구 등으로 다양해졌고 특히 병(甁)이 많았다. 이는 백자에 쓴 시의 주제가 대부분 ‘술’이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 백자에 적힌 시구에 등장하는 ‘주천(酒泉)’은 술이 솟는 샘을, ‘우(雨)’는 비가 내리면 찾아오는 벗을, ‘호중일월(壺中日月)’은 술에 취하니 병 속에 해와 달이 있음을, ‘유하주(流霞酒)’는 신선이 마시는 술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문인취향의 시를 쓴 백자의 제작이 조선 후기에 집중된 것은 경제력을 갖춘 중인층과 양인층의 등장으로 예술품을 수집하고 향유하는 열기가 상품적인 수요로 이어진 것, 그릇을 주문한 사대부들이 분원을 방문하여 백자에 직접 시를 쓴 사번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담헌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로 장서가 1만 권에 달했으며 당대의 이름난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교유했다. 그의 문집 『두타초(頭陀草)』에는 그가 숙종 35년(1709)에 묘지(墓誌)를 사번하기 위해 이십여 일 동안 분원에 머무르며 지은 시가 실려 있다. ‘회청(回靑)을 은(銀)처럼 아껴 글자를 쓰고, 두꺼비 모양의 연적이 가장 기이하며, 중국풍의 팔각항아리가 모양이 좋았다(回靑一字惜如銀. ...蟾蜍硯滴最奇品. ....八面唐壺眞好㨾)’


또 조선 중기의 학자 홍태유(洪泰猷, 1672~1715)는 『내재집(耐齋集)』에 그가 임도언(任道彦, 1685~1728)과 함께, 분원에서 백자번조를 감독하는 이종사촌 조예경(曺禮卿)을 방문하여 백자필통〔沙筒〕을 주문한 일을 기록하였다. 조예경은 분원 장인에게 백자필통 세 개를 만들도록 지시하였고 이를 홍태유, 임도언과 각각 한 개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다. 또 훗날 자손들이 백자필통이 만들어진 유래를 알 수 있기를 바라며 홍태유에게 그 사연을 필통 표면에 적도록 하였다. 이 백자필통은 현재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사연에 부합하는 ‘백자청화시명병(白磁靑畵詩銘甁)’ 두 점이 부산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한다.


03.백자병에 적힌 오도일의 시, 부산박물관 소장

三年銘鏤戒常存 삼 년 동안 가슴에 새기어 경계함이 항상 있어
縱對黃花不對樽 비록 국화꽃을 대하여도 술동이를 마주하지 않았네.
宮醞特宣西省月 숙직을 서는 달밤에 궁온을 특별히 내려주시니
此身醒醉摠君恩 이 몸이 술 깨고 취함이 모두 임금님의 은혜로다.


숙종과 오도일의 군신 간 일을 기리기 위해 제작

부산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시명병’은 몸통 무게중심이 아래로 쳐졌고 목은 길고 유려하게 뻗었는데 그 끝은 도톰하다. 잡티가 없는 깨끗한 백토를 사용하였고, 유약은 푸른색이 감돌고 맑아 단아하고 청아한 기품이 있다. 병의 형태, 양질의 태토, 청화안료의 사용 등으로 볼 때 1883년 분원이 분원공소(分院貢所)로 전환되어 그 운영권이 민간에 이양되기 전에 제작된 백자로 판단된다. 몸통에는 청화 안료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네 글자, 세 글자를 번갈아 가며 시를 썼다. 이 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의 문집 『서파집(西坡集)』권 팔 「후호촌록(後壺村錄)」에 실려 있다. 『서파집』은 영조 5년(1729) 3월에 오도일의 삼남 오수엽(吳遂燁)이 철활자(鐵活字)로 간행한 문집이다. 시 내용은 ‘백자병에 적힌 오도일의 시’ 사진과 같다.


오도일은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는 관지(貫之)이며, 호는 서파(西坡)로, 임진왜란 때 피난일기 『쇄미록(瑣尾錄)』을 쓴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증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의 손자이다. 술을 매우 좋아한 그는 문장에 뛰어났으며, 현종 14년(1673)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숙종은 오도일을 매우 아껴서 숙종 21년(1695) 1월 강원도 관찰사로 떠나는 그에게 직접 시를 하사하기도 했다. 오도일은 대제학이던 숙종 23년(1697) 4월에 숙종이 봉행한 사직제(社稷祭)에 작주관(爵酒官)이면서 만취하여 임금 앞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일로 파직을 당하였고, 숙종은 그의 과음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서파집』에 실린 그의 시 중 ‘삼 년 동안 가슴에 새기고 경계하여 술동이를 마주하지 않았다’는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오도일은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숙종 29년(1703) 유배지인 장성(長城)에서 59세에 죽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38권 1703년 2월 14일의 기사는 ‘오도일이 유배지에 있으면서 방탕하고 패악하여 사람의 도리를 잃었는데 술로써 마음을 풀고 취하면 짐승과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오도일의 시가 적힌 두 점의 백자병은 그의 사후 백여 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졌다. 이는 숙종과 오도일 사이에 있었던 군신(君臣) 간의 아름다운 일을 기리고, 술을 경계하지 못하여 끝내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교훈으로 삼고자 후손들이 분원에 주문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오도일, 『西坡集』
• 부산박물관, 2013, 『珍寶』 부산박물관 소장유물도록.
• 이금비, 2011, 「朝鮮後期 詩銘白磁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글, 사진. 박경자(청주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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